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불편한 소리에 심란할 즈음, 새소리와 함께 강렬한 햇빛이 비치는 강가에 단란한 가족들이 등장한다.
풀밭에서 소풍을 즐기며 수영하는 자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빠가 보이고, 아직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도 보인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 중령의 가족들로 수용소 바로 옆의 사택에 살고 있다. 아내인 헤트비히는 5남매를 키우면서 집과 넓은 정원과 텃밭을 아름답게 가꾸며 살고 있다. 물론 유대인 하인들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결과물들이다. 남편의 생일에 나무로 만든 요트를 선물하기도 하고 집에서 파티를 열어 군인 친지 가족들을 초대하기도 한다. 가끔씩 수용소에서 가져오는 물건 중 비싼 모피 코트를 입어보기도 하고 고급 화장품과 향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부인들의 모임에서는 수용소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치약에 숨겼다며 치약 속을 자세히 찾아보아야 한다고 농담을 한다.
어릴 때 가난했던 그녀는 고위직 남편과 정원이 딸린 좋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행복해한다. 자신의 집에 방문한 친정엄마에게도 자신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포도나무로 가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편에는 수용소가 있고 그들을 죽이고 태우는 소각장이 있다. 소각로를 밤낮으로 작동시킬 때 나는 소리는 특히 밤에 심하고 그때 멀리서 울음과 비명이 뒤섞여서 들린다. 친정엄마는 낮에는 딸의 집과 정원과 훌륭한 식사에 감탄했지만 밤이 되자 굴뚝의 연기와 그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새벽에 쪽지를 한 장 남기고 떠나 버린다.
남편이 다른 근무지로 전출 명령을 받자 당황한 아내 헤트비히는 자신이 애써 가꾸어 온 보금자리에서 떠날 수 없다며 남편만 근무지로 가라고 한다.
아기는 밤낮으로 울어대고, 딸아이는 몽유병으로 밤중에 아무 데나 가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다. 큰아들은 남동생과 정원에서 놀다가 갑자기 동생을 온실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다.
캄캄한 밤 소각로 가동하는 소리가 흉흉한 가운데, 한 소녀가 수용소 노역장 안으로 들어가 유태인 재소자들이 찾아 먹을 수 있도록 사과를 여기저기 떨어트려 놓는다. 흙더미에 사과를 놓다가 작은 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열어보니 그 안에는 종이에 쓴 악보가 접혀 있었고 소녀는 그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해 본다. 같은 시각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딸을 위해 회스 소령은 딸을 침대에 데리고 가서 동화책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준다. 헨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얀 돌멩이와 빵조각을 떨어트리고, 그레텔은 결국 헨젤을 구하고 마녀를 화로 안에 처박는다.
유태인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시스템인 ‘회스 작전’을 수행한 공로로 그는 진급하고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게 된다. 이를 아내에게 전화로 알리고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구역질을 하며 복도를 바라보고 그 공간은 갑자기 현재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의 전시공간으로 변하지만 그는 이것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계단 아래로 사라진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많은 영화들이 있다.
대부분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을 묘사했었다. 거기서 가해자들은 절대적인 악마였다.
또는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거대한 악의 시스템 안에서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악을 수행한 사람들이라는 시각도 있다. '생각 없음'이 결국 악이라는 말이다.
이 영화는 결이 다르다. 유태인이 겪는 고통을 시각적으로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소각로의 작동 소리와 알 수 없는 신음과 굴뚝에서 뿜는 연기로 그것을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 대조적으로 옆에서 사는 소장의 가족들이 유복하게 사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수용소가 보이지 않게 담장을 쌓고 그것을 가리는 포도나무를 심고 소각로 굴뚝의 연기나 작동 소리는 안 보이는 척 안 들리는 척하고 잘 먹고 산다. 남편의 전출로 떠날 수도 있었던 장소를 자신이 가꾼 보금자리라며 고집을 부리며 떠나지 않는다. 친정엄마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환경을 헤트비히는 단지 편하고 사치를 누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떠나기를 거부한다.
그 댓가로 아이들의 마음은 병든다. 큰아들은 동생을밀폐공간에 가두어 고통을 주고, 딸은 잠들지 못하고 배회하며, 아기는 계속 운다. 눈만 가리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유태인을 태운 뼛조각은 강물에 떠내려 와서 아이들이 수영할 때 몸에 묻는다. 아무리 목욕을 깨끗하게 해도 그 죄는 영혼을 더럽힌다.
영화에 나온 주인공 남자와 여자를 멀리 떨어져서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역사에 기반한 실제 이야기이기는 해도 이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만든 작품이 아닌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회스가 느끼는 구역질은 사실 관객들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소장의 부인 헤트비히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정도는 달라도 우리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그녀가 유대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의 재산까지 착취하는 것을 보면 섬뜩하다. 그러나 대상만 바꾸면 이것은 현대의 보통 사람들도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른 종교나 다른 인종을 비인격화하고, 빈곤국 아이들이 굶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3세계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나 아닌가?
재료값도 안되게 물건을 싸게 샀다고 좋아하지만 그 뒤에 빈곤국 어린 노동자들이 사람 취급도 못 받고 못 먹고 일해서 그것을 만든다는사실에 눈 감는다. 우리가 별 노력 없이 잘 사는 것이 저편의 누군가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보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악이다.
감독은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나치의 만행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을 포함해서 현재 살고 있는 세계의 사람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희생자였던 유태인들이 영원히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지금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행위도 악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유대인이면서 이스라엘의 가자 지역 폭격을 비판하고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성찰하도록 만드는 감독이 존경스럽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과를 가져다 놓는 폴란드 소녀이다. 헨젤이 떨어트렸던 흰 돌이 달빛을 받아 빛나듯,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소녀와 사과가 영화 속에서 빛난다. 남매가 그 돌을 이정표 삼아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듯 우리도 소녀와 사과를 따라가면 구원을 바랄 수 있을까. 신은 어쩌면 이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이 소녀때문에 인류를 살려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레텔이 헨젤을 구하고 화로에 마녀를 집어넣었듯, 유태인들은 해방되었고 회스는 처형당했다. 지금은 누가 누구를 화로 속에 처넣고 있을까.
소녀가 발견한 악보를 보며, 죽어가면서도 아름다운 노래를 남기기를 원했던 희생자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죄를 지으며 남의 희생으로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를 노래를 만들며 사는 인생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