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둥지를 짓는 자식들
새들은 둥지를 마련하고 짝을 선택하고 알을 낳는다. 부모 새들이 알을 품고, 알이 부화하면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가 그들을 키운다. 머리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부모가 물어 다 준 먹이를 먹고 자라서 둥지가 좁을 정도가 되면 그들은 둥지를 떠난다. 새끼들이 떠나기 전 부모 새들은 새끼들에게 나는 연습을 시키고 좀 더 보살피지만, 얼마 후 완전히 새끼들을 독립시킨다. 독수리 같이 몸집이 큰 새들의 경우는 더 긴 기간 부모의 둥지에 머문다. 그들은 덩치가 커서 나는 연습도 더 어렵고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은 부모의 둥지를 떠난다. 솜털 대신 깃털이 나고 날개 근육이 발달해서 날 수 있다면 새끼들을 내보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유아기도 길고 교육 기간도 길어서 부모의 집에 머무는 시기는 훨씬 길어진다. 물론 미국 같은 경우는 나라가 커서 멀리 있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독립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땅도 작고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그런지 더 늦은 편이다. 취직하면서 나가기도 하고 결혼할 때 독립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인간은 새보다 분리시키는 것이 어렵다. 새처럼 본능적으로 새끼가 독립하는 시기를 결정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정서적으로 얽힌 자식들을 선뜻 내보내지 못한다. 내보내고 나서도 허전함을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을 이른바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도 부른다.
나는 겉으로 이성적인 척했지만 자식들을 과보호하면서 키웠다. 어릴 때는 쫓아다니며 밥을 먹였고 아이들 식사 때문에 집을 잘 비우지도 않았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어도 비슷했던 것 같다. 집은 언제든 엄마가 기다리고, 따뜻하고, 먹을 것이 있고,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제는 아들들이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라는 것이다. 내가 80이 넘어서도 아들들 밥상을 차리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서 정신이 번쩍 날 때가 있었다.
얼마 전 결혼한 작은아들 가족이 아기를 데리고 잠시 우리 집에 머물면서 둥지가 붐볐다. 기회를 보던 큰아들이 독립하겠다고 했다. 언제고 나가야 하니 잘 결정한 것 같다.
예전 글에서 아들들을 기쁘게 떠나보내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때 심리적으로 아들들을 독립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는 아들이 공간적으로도 독립하게 되었다.
작은 아들 가족도 미국으로 돌아가고, 큰아들도 짐을 빼니 집이 텅 비었다. 그냥 시원하기만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허전하기도 했다.
그 즈음에 남편도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우리 부부는 젊고 아이들이 어린 상황인데, 놀이 공원같은 곳에 가서 아이들 둘을 다 잃어버렸다. 아이들을 못 찾았는데 아내는 구경할 게 많다며 걱정도 안했다. 둘이 쇼를 구경하기 위해 깊은 분지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다가 포기하고 다시 위로 올라가다가 꿈에서 깼다."
아들들은 이제 성인인데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아직도 보호해야 할 어린이들이다. 품에서 사라지니 걱정이 앞선다. 작은아들 부부가 도움 없이 아기를 잘 돌볼까 걱정되고, 큰아들이 직장 다니며 음식도 잘 만들어 먹을지도 걱정이 된다.
그러나 절대 도와주지도 참견하지도 않으려 한다. 늦었지만 이제는 부모의 둥지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둥지를 지을 시간인 것이다. 서툴러도 아기의 부모 역할을 하고, 맛있고 좋은 음식이 아니어도 서툴게 만든 요리를 먹고, 퇴근 후 자기 공간에서 살 때이다.
허전함에서 벗어나, 그동안 긴 시간을 들여 그들을 보살피고 내보낸 나를 스스로 칭찬한다. 이제는 아이들 밥 차려주려고 외출했다가 허겁지겁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이제서야 옆에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눈에 띈다. 그동안 아이들이 성장했는데도 맛있는 것은 남편보다 아이들 먼저 챙겼던 우를 범했었다. 이제는 둥지를 절대 떠나지 않을 가족인 남편을 최우선으로 챙기려 한다. 우리 둥지의 중심인 부부가 서로를 보살피며 즐겁게 살아가려 한다. 함께 대화하고, 운동하고, 여행하며 낡은 둥지를 잘 지키려고 한다. 처음 둥지를 짓던 때처럼 둘이 주인공이 되어 함께 여생을 설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