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랑의 블랙홀>-반복에 숨어있는 변화라는 기적

끝없는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마법

by 윤병옥

우리는 많은 타임루프 영화를 보아왔다. ‘이프 온리’, ‘내가 7번째 죽던 날’, ‘팜 스프링스’, ‘리스타트’, ‘해피 데스 데이’, ‘엣지 오브 투모로우’등등 정말 많은 영화들이 어떤 날 하루를 무한 반복하는 형식에다 각각 다른 이야기를 얹어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의 원천, 혹은 시조새라고 볼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사랑의 블랙홀’이다.

그러나 영화가 재미없었다면 이런 형식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라고 해서 사람들이 억지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최근 영화와 비교해봐도 스토리나 재미와 감동면에서 오히려 뛰어나다. 오리지널에 비교하면 다른 영화들은 일부의 소재와 배경으로 주제를 변주할 뿐, 넓은 관객층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원제인 ‘Groundhog Day’는 2월 2일로, 우리나라로 치면 개구리가 잠을 깨는 경칩 비슷한 날이라고 한다. 이날 마못이라는 동면하는 다람쥐과의 동물이 나와서 자기의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 길어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어떤 도시 사람들은 모여서 재미 삼아 마못을 등장시켜 봄맞이 축제를 한다.

매년 펑추토니라는 도시에서 열리는 축제에, 방송국에서 일기예보를 하는 주인공 필이 방문하여 생방송으로 마못이 그림자를 보았나를 중계해 왔다. 그는 사실 자신이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축제에 참석하는 마을 사람들은 다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침 방송을 위해 전날 PD인 리타와 촬영 기사 래리와 도착하여 셋은 동네에서 하루를 묵는다.

다음날 아침 6시, 방송을 위해 라디오 알람으로 일찍 잠을 깬 필은 방에서 나와 어떤 투숙객 남자와 마주치고,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과 시시한 농담을 하고 나와서 노숙자를 지나치고, 길에서 보험 사원인 동창 친구의 끊임없는 구매 권유를 받고, 이를 피하다 길 위에 고여있는 물웅덩이에 발이 빠지고, 겨우 도착한 축제의 중계방송에서 냉소적인 멘트로 방송을 한다.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길이 폭설로 막혀서 셋은 하루 더 이 도시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된다.


하루를 더 묵고 다시 아침이 되어 알람 방송이 시작되었는데 같은 노래가 나오며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필은 게으른 방송국 사람들이 재방송을 틀었다고 생각하지만, 나가서 보니 어제와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한다.

며칠이 지나도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되고, 내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아무 짓이나 하겠다며 사회의 규칙이나 금기를 깨고 다닌다. 음주 운전과 철길 운전 등을 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같은 호텔 방 침대에서 같은 알람을 듣고 깨어나서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 하루에 일어나는 일의 순서를 꿰고 있어서 남이 하는 말을 미리 알 수도 있고 사고를 피할 수도 있으며 아름다운 여자 낸시의 신상 정보를 매일 수집하여 그녀를 감동시킨 뒤 자신과 밤을 보내게도 만든다. 건강에 나쁜 음식도 마음껏 먹고, 급기야는 현금 수송차도 턴다. 경비가 언제 한눈을 파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걸리지 않고 많은 돈을 훔칠 수 있는 것이다.

자신과 방송하는 피디 리타에게도 낸시에 썼던 방법대로 수작을 걸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번번이 실패하며 무수히 뺨을 맞는다. 그녀의 전공이나 좋아하는 취향이나 술 먹을 때 하는 건배사까지 알아내고 아무리 오랫동안 공을 들여도, 그녀는 필이 부자연스럽고 뭔가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한다고 생각하고 거부한다.

절망한 그는 생방송에서 겨울이 계속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고 앞으로 마못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게 납치하겠다며 자동차에 싣고 과속하다가 절벽에서 추락하여 불에 탄다. 그러나 그다음 아침 다시 똑같이 깨어난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욕조에서 감전되어 죽어도 똑같은 아침은 어김없이 시작된다.

식당에서 리타에게 자신은 죽지도 않고 똑같은 하루를 다시 산다고 말하니 처음에는 믿지 않지만, 필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다음 행동과 말을 모두 예견해서 맞추자 리타도 믿기 시작하며 하루를 같이 지내주겠다고 제의한다. 둘은 책을 읽고 밤을 같이 새우게 되고 필은 자신이 리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

다음 아침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진 그는 같은 루틴을 다른 마음가짐으로 하게 된다. 자발적으로 노숙자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축제장에 갈 때 동료들에게 줄 커피와 도넛도 사 가지고 간다. 식당에서 들은 피아노 연주에 호감을 느끼고 피아노 강습도 받기 시작한다. 길거리에서 얼음 조각가를 보고 자신도 조각을 연습한다. 귀찮게 구는 동창도 마주쳤을 때 반갑게 안아준다. 저녁때 길에 쓰러져 있는 노숙자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그는 죽게 된다. 자신이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아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자책하여, 다음날엔 식당에 데려가서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지만 저녁때 역시 세상을 떠난다. 인생에는 자신이 막을 수 있는 일도 있고 막을 수 없는 일도 있는 것이다.

드디어 어느 아침 그는 자신의 방송에서 “겨울은 황량한 계절이 아니라 순환의 일부이고 희망이 숨어있다”는 통찰이 느껴지는 멘트를 하여 사람들을 모두 감동시킨다. 늘 일어나던 일들을 기쁘게 수행하고, 예정된 사고를 막는 그를 온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게 된다. 필은 그를 다시 보게 된 리타와 마을 파티장에 가서, 그동안 수없이 연습했던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공원을 지날 때 수없이 마음에 그렸던 리타의 아름다운 얼굴을 얼음으로 조각한다. 이제 그는 내일 무슨 일이 생겨도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다음날 6시 알람의 멘트는 달라졌고, 옆에는 리타가 자고 있고, 창밖엔 흰 눈이 쌓여있다.

그는 “오늘이 바로 내일이야”라고 말하며 리타와 함께 뛰어나가고, 둘은 그 마을에서 앞으로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부모들은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녀들에게 나중에 후회할 거라며, 배우고 성장하는 그 시절이 얼마나 좋은 때인지를 역설하곤 한다.

사실 지나고 보면 부모의 말은 다 옳다. 성인이 되고 가정까지 책임지다 보면 돈을 벌어야 하는 반복적인 일상을 끝없이 이어가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자동으로 일어나서 출근하고 늘 똑같은 환경에서, 심지어 주위 사람들이 무슨 대사를 이어갈 지도 예상이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사랑도 매뉴얼에 맞춰 진행하면 뻔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 다 비슷한 그저 그런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것이다.

주인공 필도 오랜 시간 방송국에서 일기 예보관으로 일하며 타성에 젖은 삶을 살다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그 과정을 필이 타임 루프에 갇힌 것으로 설정하여 표현한다. 그야말로 ‘일상 지옥’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에게는 예상되는 모든 일들이 지겹고 심드렁하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신선한 공기와도 같은 존재는 같이 일하는 아름다운 여성 리타이다. 그러나 과거에 여자들을 꼬셨던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그녀는 난공불락이다.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는 서서히 변화한다. 모두들 나이 들어서 머리도 굳고 배우는 속도도 늦어져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지만, 필은 어느 날부터 피아노 강습을 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도레미도 모르던 필이 오랜 시간의 반복과 연습을 통해서 수준이 높아지고 결국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을 연주해낸다. 긴 인생에서 핑계 대지 말고 공부하며 성장하라는 것이 영화가 주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가슴속에 긴 인생 동안 꾸준히 발전시키고 싶은 것이 있는가, 어떤 것을 경지에 이르게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당신은 그것에 헌신할 용의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공원의 얼음 조각가에게서도 조각을 배워서 나중에는 리타의 얼굴을 너무도 아름답게 조각하는 경지에 이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훌륭한 조각을 위하여 기술을 연마하는 것과, 사랑을 위하여 오랜 시간 동안 상대를 바라보는 행위이다. 즉, 사랑에는 방법적인 면뿐만 아니라 긴 시간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각의 결과물이 너무도 훌륭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은 필이 리타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그녀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사랑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도 터득했다는 의미이다. 예술품이 아름다운 것은 예술가가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숙련된 방법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에서 필은 지루한 일상 속에서도 어떤 것을 선택해서 긴 시간 노력하면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기적을 보여주고, 사랑이라는 마법을 통하면 무한 반복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주제를 처음으로 타임 루프 형식에 담아 전달한 감독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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