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의 적색 신호등 (1)
자기소개서에 나만의 강점을 쓰라는 말에 나는 항상 '융통성' '적응력' 같은 말을 쓰곤 했다. 그것은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그나마 남들보다 나은 나만의 강점이 맞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호흡 속에서 나는 더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고, 자신에 대해 욕심도 많아서 무언가를 하나 맡으면 꼭 잘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무튼, 저 강점이 회사생활에서 나를 옭아맬 줄이야. 적응 잘하는 신입사원, 얼마나 부려먹기 편한가. 부려먹기 편한 신입사원이라는 타이틀은 과장으로 하여금 눈치 보지 않고, 나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껀덕지였다. 첫 행사에 바로 50:50으로 일을 나누던 과장은 그 다음부터는 '너 혼자 할 수 있지?' 라고 말하고는, 모든 일을 나에게 일임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사소한 이벤트부터 회사 브랜드를 걸고 나가야 하는 행사까지 내가 회사의 일원인지 과장의 따까리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나의 그 거지같은 적응력 때문에 어떻게든 6시에 칼퇴 하나만큼은 고수하고 있었고,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 질식사할 것 같다는 여타 다른 사람들의 지극히 일반적인 이직 사유에 비해 내 이직 사유 ('상사가 너무 꼴뵈기 싫어요')는 새발에 피였다.
하지만 너무 감사하게도, 처음에 쎄한 그 느낌 그대로 그는 곧 꼴뵈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학을 뗄 수준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직 준비를 서둘렀고, 원래 이직이 되면 바로 떠난다의 마인드였다가, 이직이 안되도 만 1년을 채워 퇴직금을 받고 퇴사하겠다는 마인드를 생성하게 해주었다가, 결국 만 1년을 한달 남긴 11개월 만에 내가 퇴직서를 내밀게 만들었다
에피소드 1: 신입사원은 바보여야만 했다. (feat. 복지포인트)
회사는 1년 마다 캘린더를 만드는 사내행사를 개최하곤 했다. 명목은 영업팀이 기존 고객처를 관리하기 위해 보내는 상품의 일환이었으나, 보험 상담만 받아도 가질 수 있는 흔한 회사 캘린더를 굳이 사내 임직원들이 직접 응모한 사진으로 구성하겠다는 것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점이었다. 문제는 사진 추합인데, 한명당 응모할 수 있는 사진의 개수 제한이 없다보니, 사진이 당첨되면 받을 수 있는 복지 포인트를 받기 위해 어떤 사람은 50장이 넘는 사진을 응모하곤 했다. 당연히, 각 사진 당 최소 1MB가 넘는 사진들을 모두 취합하는 것은 내 몫이었으며, 내 메일함은 매일 리스팅을 해주지 않으면 용량에 과부하가 걸려 다른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차있었다.
모든 사진을 추합한 결과 사진은 약 600장 정도였다. 초점과 사진 비율 등을 고려해서 1&2차 사진 셀렉을 거친 최종본을 모두 출력하고, 사장실 책상에 놓으면, 사장이 1월부터 12월까지 12개의 사진을 고르는 것으로 캘린더 사진 선정이 마무리됐다. 1&2차 셀렉은 담당자가 진행해야 했기에, 나는 공정성을 위해 모든 사진 응모자와 사진 제목을 암호화했고, 리스트를 정리한 파일을 꽁꽁 숨겨두었다. 하지만 사내 행사이니만큼 팀장에게 총 몇명의 인원이 몇개의 사진을 제출했는지 보고해야 했고, 모든 사진을 정리할 때까지 무려 9년동안 자신의 사진이 뽑히지 않았던 적이 없다고 자부한 과장의 사진은 볼 수 없었다.
나: 과장님, 저 이거 팀장님께 보고해야 하는데, 과장님 사진 아직 제출 안하셔서요. 오늘까지 첨부 부탁드립니다.
과장: 어, 그거 그냥 개수 20개, 사람 한명 추가해서 보고해. 내껀 나중에 낼게
설마 1&2차 셀렉까지 자신의 사진을 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그대로 보고를 진행했으나, 예상헸겠지만, 과장은 자신의 사진 없이 1&2차 셀렉을 진행했고, 무려 사장실에 올라가는 날까지 나는 그의 사진을 보지 못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내가 눈가리고 귀가리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 담당자인 내가 어디까지 행동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단은 무엇이든지 내가 직접 두눈으로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에 전략적으로 행동했다.
나: 과장님, 저 최종본 셀렉하러 사장실에 같이 들어가는 것 맞죠?
과장: 아, 들어가고 싶니? 그럼 같이 가고
그는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나를 데려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사진을 추합하고, 제목을 확인하고, 사진의 각 담당자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는 사내 유일한 담당자를 1&2차 셀렉까지만 써먹고, 부사장과 사장이 들어가는 회의에는 나를 빼려고 했던 것이었다.
아 저 너무 셀렉 최종본 보고 싶어서요! 라는 구역질나는 가증스러운 말로 일단락 짓고,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나는 내가 증인이 되어야 겠다라는 마음가짐 + 도끼눈으로 회의실에 들어갔다.
1&2차 셀렉을 거친 100여장의 사진을 들고, 최종본이라는 사진들을 사장실 바닥에 뿌리는 순간, 나는 못 보던 사진을 최소 8장이나 발견했다. 드론으로 사진을 찍고, 사내 포토샵 장인이라던 사람이 찍은 사진도 1&2차 셀렉을 통해서 한명당 최대 3~4장의 사진을 올렸는데, 모든 사진의 주인과 사진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 앞에서 버젓이 최종으로 자신의 새로운 사진 8개를 넣었던 것이다. 너무나 민망하게도 내가 사진을 잘 기억해서가 아니라, 최종본으로 올라온 사진의 퀄리티들에 비할 바가 못돼는 사진들이었고, 그 새로운 사진들 모두 나를 향해 메롱을 선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장이 어떤 사진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 가지 사진을 고민하고 있으면, 은근슬쩍 자신의 사진을 스리슬쩍 내미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는 또다시 캘린더에 자신의 사진을 넣었고, 10번째 복지 포인트 수령자가 되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무시하면 안된다지만, 그의 행동의 명백한 거지 근성이었다. 그동안 자신 혼자 그 회의에 들어가 자신의 사진을 밀어넣고는, 한번도 사진 선택이 안된적이 없다는 자랑을 할 수 있는 안면의 두꺼움에 경외를 금치 못했다. 무엇보다, 사내 행사라는 것은 모름지기 신입사원이나 저년차 사원들에게 회사의 복지 정책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행사의 아름다움일진데, 임원급부터 과/부장급까지 서로 30만원을 타겠다는 그 눈치싸움에 나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가장 화가 났던 것은 신입사원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과장이 무슨 생각으로 내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사진을 들이밀고는, 또 사진이 당첨됐다며 부서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그것을 사장이나 팀장에게 말할 수 없었다. 팀장은 그런 사내 행사 30만원으로 불난을 일으키는 것을 극혐하는 위인이었고, 나 역시 상사가 하나인 상황에서 내 30만원을 뺐은 것도 아닌 일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일이 소문 난다면, 필히 출처는 나일것이라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과장 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 혼자 귀를 닫고, 나 혼자 눈을 감기를 바라는 것 같았고, 나는 실제로 바보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