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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Sep 13. 2020

도교와 유교가 혼재된 후불탱화

     이 글은 블로그의 글을 편집하고 퇴고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그동안 가족에 관련된 글을 썼다.  매일 먹는 반찬이 지겨워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나의 블로그 '군법당 이야기'를 뒤적였다. 어느 일요법회 날 병사들의 잠을 내몰기 위해 후불탱화에 관하여 설명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명색이 불자라면 후불탱화나 불상에 깃든 의미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나는 옆길로 샜다.


  지난가을 부산에 사는 법우가 대구 동화사에서 불화(佛畵) 전시회를 개최한다며 나를 초대했다. 난 불교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내 나름 공부를 좀 했다. 그 자부심으로 현장을 찾았더니 실망이 컸다. 법우가 지도교수의 불화 앞으로 나를 인도했다. 불교가 이 나라에 들어온 지 2000여 년이 다 됐다. 그런데도 지도교수는 중국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채색과 분위기를 현대적으로 바꾼 것 외엔 차이가 없었다.      


  모년 모월 모일 모시 병사 두 명과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앉았다. 삼귀의와 오계문을 독송하는 도중 문득 스님과 경전을 독송할 때 그 내용이 이해되는지 궁금해졌다. 독송을 마치고 매 달 한 번 일요법회에 오시는 스님의 예불 책을 병사들에게 주어서 어느 부분을 독송하는지 물었다. 천수경과 사시 예불문, 법문한 다음 반야심경으로 마무리한다고 했다.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펼쳐서 한글로 적힌 문장을 이해하느냐고 질문해봤다. 제옥이와 동우는 하나 같이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 국가이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열반 후 대승불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지리멸렬하였고, 그 꽃은 중국에서 피어났다. 중국 당나라 어느 시절에 역경승들이 모여서 산스크리트어 원문을 읽고 또 읽으며 들리는 소리를 한자로 옮겼다. 한자로 번역된 불경과 불교는 고구려(AD327), 백제(AD372), 신라(AD572) 순으로 받아들이면서 당시 중국의 문물도 도입되었다.


  현재 우리 불교는 한자를 한글로 해석하여 '우리말 법회 집'으로 독송한다. 불교 기초교리를 전혀 모르는 병사들이나 어른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나 또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뜻을 이해하고자 자주 자전을 펼쳤다. 붓다 재세 시의 고대 인도는 힌두교가 국교였다. 그러므로 삼국이 유교와 도교가 이미 혼재된 채 유입이 되었다. 신라는 원광법사께서 유불선(儒佛仙)을 통합하여 '세속오계'를  만들었다.


 후불탱화는 붓다를 중심으로 불보살이 유교와 도교의 복색으로 도열해 있는 불상 뒤의 대형 그림이다. 중국의 도교와 유교가 함축된 후불탱화 설명을 병사들에게 내친김에 알려주기로 했다. 이 녀석들은 독송하려고 앉으면 하품부터 해댄다. 급기야는 눈을 꿈벅이며 머리가 끄덕대는 찰나여서 법문을 생략했다.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밀어붙인다.


  문경군법당 후불탱화에는 중앙의 붓다, 사진 좌우로 사대천왕(四大天王)과 공양물을 든 선녀(仙女)와 옥황상제와 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사천왕의 장군복장(服裝)은 유교의 과거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붓다를 옹호하고 가람을 수호한다.

*아래 말풍선: 구름모양은 좌우 선녀가 공양을 올리려고 영지버섯과 과일을 두 손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동그라미는  도교의 옥황상제와 동자이다.



   *동방의 지국천왕은 지물을 비파, 남의 증장천왕은 칼, 서의 광목천왕은 입에 여의주가 없는 용을 왼손으로 꽉 움켜쥐고, 오른손에 여의주를 들고 있다. 용은 여의주를 물지 않으면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한다. 북은 다문천왕으로 탑이나 창을 들었다. 인도는 방향을 동남서북으로 우리와 달리 한다.

  

  *파란 테두리- 그림 왼쪽 붇다 옆 합장한 채 정면을 쳐다보는 스님은 아난존자와 다섯 제자, 오른쪽 붇다 어깨 옆 하얀 수염과 눈썹은 가섭존자. 가섭존자 뒤 책을 든 라훌라 존자 등 좌우 십 대 제자이다.  





  도교는 북극성, 북두칠성, 별자리 28수宿)를 신앙화하였다. 즉 별을 신격화하였다는 말이다.

  북극성은 칠성여래라고 부르며 그림 중앙의 주불이다. 그림 맨 위 상단 좌측에 옥황상제, 우측 남극성의 머리가 뾰족한 수성노인. 그리고 좌우 녹색 두광(頭光)의 칠불(七佛). 칠불 어깨의 북두칠성을 칠원 성군이라 칭한다, 북두칠성 가까이에 삼태성(三台星) 쌍으로 있어 중단 좌우 윗줄에 3명씩 6, 바로 아랫줄에 섰는 권속들 4위씩 8 도합 14위. 하단 좌우의 권속들이 7위씩 14위 모두 별자리 28수를 표현하였다.


  삼각 구도로 하얀 구슬이 있는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월광보살과 빨간 구슬을 든 일광 보살, 즉 달과 태양을 의미하며 천의를 걸치고 있다. 영지버섯 같이 생긴 상서로운 구름이 천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달과 태양도 신격화하였다.


  유교는 두 손으로 홀(笏: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 길이 한 자쯤, 너비 두 치쯤이며, 얄팍하게 길쭉히 되었고 그 신분에 따라 1 품부터 4품까지의 벼슬아치는 상아, 5품 아래로는 나무로 만듦. 네이버 참조)을 들고 있으며 조복을 입고  있는 것이 근거다.

절묘하게 천지만물을 불교라는 이름으로 탱화 속에 도교와 유교가 깊이 들어와 있다. 우리 불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다.


  결론은 상단의 칠 여래만 불교를 상징한다. 칠 여래 아래 북두칠성을 낮게 배치했지만 동격으로 그렸다. 상단 배치가 동격이라는 말이다.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다. 도교는 노자이며, 공자는 유교이다. 노자와 공자는 성인 소리는 듣지만 깨달은 분들은 아니다. 불교는 불교이고 도교는 도교이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결합입니다.


  


  2012.9.8 오후 2시 3분에 촬영한 강화도 보문사 삼성각 중앙에 배치된 칠성 여래 탱화이다.

  이 탱화도 중앙에 북극성을 칠성 여래라는 이름으로 주불로 안치, 달을 월광보살과 해를 일광 보살이라 하여 협시했다.  주불의 금색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뒤 반원은 28수(宿)를 벼슬아치 복장으로 배치했다. 녹색 두광을 한 칠 여래 사이로 사진 오른쪽 수성 노인과 왼쪽에 옥황상제가 상단에 배열됐다. 하단에 조복을 입고 관모를 쓰고 홀을 손에 든 벼슬아치 복장의 칠원 성군을 좌우에 배치시켰다.   

  도교와 유교가 공존하고 있다.




  삼성각 좌측 독성단의 나반존자. 독성은 홀로 독(獨), 성인 성(聖)으로 고대 인도에서 홀로 깨달음은 얻은 성자이다. 나반존자를 신앙하는 대부분은 사업을 하거나 장사하는 사람 등으로 기도빨이 빠르고 잘 받는다고 하여 기도 신청이 끊어지지 않는 실정이다.)

  십장생이 있으며, 오른쪽 아래 시동이 다관에 물을 끓여 노승에게 차를 올리려는 것 같다. 시동 위 동자와 동녀가 공양을 올리려고 대기하고 있다. 이 또한 유불선이 혼재되어 있다.




  삼성각 우측은 산신이며 역시 십장생이 있고, 녹색 두광 옆으로 초록 파초가 자라고, 호랑이 암수와 두 동자가 공양물을 들고 있다. 산신은 유교와 다른 형태의 두건을 쓰고 있다.




   한 간짜리 삼성각 벽화.  도교의 전형적인 과일, 복숭아나무가 노승의 뒤로 자라고 있다. 동자가 공양물인 복숭아를 들고 앞서 걷고 있다. 공양을 올린 동자가 합장한 채 노승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등에는 표주박을 매달고 있는 듯.


  위의 사진은 도교가 우선이다.




  ㅊ2012.11.6 오전 10시 17분 촬영한 문경 봉암사에 봉안된 산신도.


  이 탱화도 유교와 도교가 공존하고 있다.

  산신은 조복을 입었고, 손에 파초선을 들었으며, 지위를 상징하는 관을 상투에 꽂고 있어서 유교를 나타낸다. 주변에는 십장생과 복숭아가 왼쪽에, 선녀가 불로 장생하는 과일을 공양 올리려고 들고 서 있다.


  석가 붓다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깨달은 분이다. 붓다의 의미가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노자나 공자는 성인이지 붓다처럼 깨달은 분이 아니다.

  붓다가 스스로를 칭하는 말이 여래(如來)다. 도교는 별인 북극성을 여래로 의인화하여 주불로 삼는 것은 불교와 동격이거나 그 이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교는 도교로서 존중해야지 불교와 동격은 말이 안 된다. 혼동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2~3년 전 대만을 다녀왔다. 불교사원인 줄 알고 들어가서 보니 도교사원이었다. 대만은 대승불교가 유명한데도 거의 도교사원만 보였다. 여러 날을 다니며 붓다를 모신 곳은 딱 한 군데, 도교사원에 비하면 간소하고 아주 단출했다. 병사들은 설명을 들으면서 계속 시계만 보더니 빨리 복귀해야 한단다.


  나는 다시 두 병사에게 당부했다.

  붓다는 오로지 '고(苦)와 고멸(苦滅)'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고(四苦)와 팔고(八苦)에서 벗어나면 고멸이다.  고멸하기 위해서 삼업三業,

  A. 몸(身)으로 짓는 身業 《① 살아있는 생명체를 함부로 해치지 않고(불살생, 不殺生), ②남이 주지 않은 것은 가지지 않으며(불투도, 不偸盜), ③잘못된 성적인 행위를 하지 않으며 불사음, 不邪淫) 3 가지와

  B. 입口으로 짓는 口業《본 것을 보았다, 보지 않은 것은 보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본 것은 보지 않았다 그리고 보지 않은 것은 보았다고 하는 ①거짓말(妄語),  ②화합을 깨는 말이나 이간질하는 양설(兩舌), ③잡담이나 쓸모없는 말을 하는 기어(綺語), ④욕은 저주이자 악담(惡口)이다.》 4 가지와

  C.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① 남의 것(눈에 보이는 대상)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貪愛), ②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하여 분노하는 마음은 폭력적인 의도가 나타나는 진에(瞋恚) 기도 하다. ③일어나는 탐애와 진에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어리석은 행위를(치암, 恥暗) 하게 되는 사견(邪見)이 생긴다.》3 가지.


  십악(十惡)은 천수경에서 십악참회로 나온다. 생활관에서 선임이나 후임에게 긍정적인 말, 배려하는 언행으로 모범이 되며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이 녀석들 마음은 가기 바빠서 이미 콩 밭으로 달아났다.


  요즘 말은 불자라면서 오계 조차 실천하지 않아 사견들만 늘어나고 있다. 치유할 수 없는 병으로, 고독한 노후를 사는 것이 생전 지옥이다. 죽어서 가는 지옥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나이 들면서 늙어가고, 갖은 번뇌와 감정의 시달림은 불치병으로 인도하며, 병으로 죽거나 태어났으면 죽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

이런 고통을 생로병사의 괴로움이라는 것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손에 들었는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물론 어렵겠지만 한 번 시도해보면 어떨까 싶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1378429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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