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3
Day 31 오늘 하루를 대표하는 키워드 세 가지를 떠올리고 키워드를 중심으로 소설 한 편을 써봐요.
오늘은 음력 시월 열엿새. 완전히 둥근 보름달이다. 새벽 거실 창으로 보이는 달은 서산으로 향하고 있다. 감지 은월(紺紙銀月)같이 화려했다. 보름 전 오후 손자와 산책하며 보았던 느낌과 사뭇 달랐다. 동쪽에 떠 있던 눈썹달은 손을 담그면 시려서 금방 뺄 것 같은 짙푸른 창공에 안긴 형국이었다.
유모차를 세우고 손전화기를 꺼냈다. 손이 찬바람에 따끔거리며 아렸다. 손전화기만 보면 내놓으라고
떼쓰는 손자의 눈치를 살며시 살폈다. 손자는 비닐 덮개를 한 유모차 안에서 손가락을 빨며 할머니를 쳐다봤다. 손자가 보채려고 뒤척거린다. 소리를 질러대기 전 한 번 더 욕심을 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녀석이 할머니의 번개 같은 망중한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할머니는 유모차를 밀며 기다려준 손자에게 고맙다고 말을 붙였다. 앞을 바라보며 눈은 사진 찍을 곳을 찾았다. 끊임없이 손자한테 큰소리로 주저리주저리 심심하지 않게 이야기를 하면서 억새 군락지로 향했다.
안심 체육공원은 금호강 둑을 끼고 길게 조성되어 있다. 딸이 사는 아파트 11층에서 손자를 안고 내려다보며 공원의 사계를 즐긴다. 조손(祖孫)은 공원 보도를 따라 억새 군락지로 들어섰다. 억새들은 지는 햇빛에 우수수수 소리를 내며 바람 따라 몰려다녔다. 할머니는 손전화기를 꺼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일부러 찾아온 군락지에는 이미 주민들이 나와서 간이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사색에 젖은 노년층들이 보였다. 하릴없는 세월을 저 억새와 나누는 듯했다. 그들을 지나면 곧바로 억새가 넓은 품으로 와락 감싸 안는다. 할머니가 억새 틈새에서 피어 있는 미국쑥부쟁이 꽃을 손자에게 만지도록 해주었다. 손자는 살며시 꽃대를 잡고 뽀뽀를 한다. 그림책에서 이쁘다고 느끼는 것은 엎드려서 뽀뽀를 해댄다. 할머니는 모든 사물을 사랑으로 대하는 손자가 기특하여 무엇이든지 경험하도록 해준다. 해 질 녘 은빛 억새는 은연중에 모정(慕情)이 생기도록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손자는 사진 찍는 할머니를 향해 두 팔을 내저으며 마구마구 고함을 쳤다. 할머니를 방해하지 말거라~
11월의 하루 해는 짧다. 두어 시간 산책을 마치면 5시쯤이다. 앞산이 산 그림자로 뒤덮이면서 어둑어둑 어둠이 내린다. 손자는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대봉 홍시 하나를 다 먹는다. 또 귤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운다. 바나나는 입을 크게 벌려서 볼이 터지도록 베어 문다. 손자가 배가 부르면 거실 창가로 기어간다. 창틀을 붙들고 섰던 손자가 할머니를 돌아보면서 "에! 에! 에!" 단음으로 부른다. 창 밖에는 어둠이 깔렸다. 퇴근 차량들이 줄줄이 아파트 단지로 들어왔으며, 가로등은 사위를 환하게 해 주었다.
손자가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창을 가리켰다. 잉크 블루 바탕에 주홍 빛의 반달이 거실 창문에 선명히 머물고 있다. 할머니와 손자는 그렇게 달이 차오르는 것을 자주 감상했다. 잿빛 구름이 달을 가리면 또 손짓을 하며 달이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 질렀다. 온통 먹장구름이 뒤덮인 밤에는 지나가는 기차와 자동차들을 봤다. "저건 장대 기차네, SRT야, KTX가 빠르게 달려가네~"
열엿새 인 오늘, 할머니는 저녁 7시 30분 즈음에 손자를 업었다. 꽉 찬 보름달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보름달은 15층 건물에 가려져서 옆 동을 지나야 만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할머니가 15층 위에 뜬 보름달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달은 빛났건만, 15층 옥상의 조명 불빛이 보름달의 아름다움을 방해했다. 밤 12시가 지나면 앞 동 건물 위에서 빛난다. 열이렛날 새벽 3시의 보름달은 할머니가 자는 방 창문에 한 점 풍경화로 걸려 있을 것이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대구 안심 체육공원에서 느티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반달. 손자에게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마할 때 치마 끈에 달랑달랑 채워줬으면" 하는 동요를 불러준다. 국민학교 다닐 때 부르던 노래다.
아래 사진: 억새 군락지에서 손자가 몸부림을 치며 질러대던 고함은 등 뒤로 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기 위해 한참을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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