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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an 09. 2021

괜찮아, 괜찮아

  서재에서 일기를 쓰고 있었다. 손자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딸의 목소리가, 사위는 서재 방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컴퓨터 모니터를 끄면서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손자 엄지발가락에 피가 보였다. 아이는 내게 안기면서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손자의 엄지발가락을 대충 잡아 지그시 누르며 지혈을 시켰다.  "괜찮다, 아가야. 괜찮아, 괜찮아." 손자를 품에 꼭 안으면서 안심을 시켰다. 어멈은 급히 구급약을  찾으러 가고, 사위는 내 옆에서 어찌할 바 몰라서 "미치겠네~  아~이 미치겠어~" 두 손을 잡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내 손자는 조금이라도 미진한 감정이 있으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떼를 쓰며 우는 녀석이다. 나의 여동생이 손자를 보면서 넘어지거나 부딪히거나 하면 "떼끼! 떽! 왜 우리 손자를 그랬어!"라며 바닥이나 벽을 때리는 시늉을 했던 모양이다. 가끔씩 손자는 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는 "많이 아프지? 우리 손자 더 조심하자."라고 말을 했다. 한 성깔 하는 손자는 사위와 잘 놀다가 다쳤다며 즈 아비를 '떼끼' 하라는 것 같았다.


  사위가 아들과 재밌게 놀았다. 사위가 아기를 재우려고 안방 문을 닫는 순간 아들의 발이 방문 끝에 닿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손자가 자지러졌다. 놀란 사위는 엉겁결에 아들 발에서 피가 보이자 당황하여서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손자는 사위의 소리에 놀라서, 그리고 발톱이 아파서 마구 울어 제쳤다. 사위가 그 울음에 마음이 쓰라렸고, 피가 나는 발톱을 보면서 "내가 미친다, 미쳐! 미쳤어~" 사위는 한숨을 푹 푹 쉬며 자책하느라 안절부절.


  나는 손자보다 사위를 진정시켜야 했다. "자네가 당황해가 그카마 아 달래기 더 어려버진다. 고마 그캐라

."  딸이 약솜과 소독약으로 손자 발톱을 소독했다. 딸은 소독을 하면서 사위의 진중하지 못한 태도와 말을 가려서 하지 않으면, 아이가 듣고 배운다며 소란스럽게 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어른이 침착해야 아이가 덜 놀란다고 하면서.  '아니, 이 녀석이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커버린 거야…' 의연하게 대처하는 내 딸이 대견하면서 한편으로 놀랍기도 했다.


  내 쌍둥이 딸은 개구쟁이였다. 돌 전 걷기 시작하면서 둘이는 자질구레한 사건을 많이 저질렀다. 특히 손자의 어미가 더 개구졌다고 기억된다. 한 날은 두 딸을 건너 방에서 놀도록 하고 방문을 닫았다, 기저귀는 세탁기에게 맡겨놓고, 청소를 하면서 방 안이  조용하여 문을 열어봤다. 내가 그 방에는 전원 콘센트가  있어서 방바닥에 전기밥솥을 항상 두는 곳이다.


  그런데 한 딸이 똥을 쌌던 모양이다. 이 놈들이 키득대며 신이 나서 벽에다 똥칠을 하고 밥솥 뚜껑에도 바르고 있었다. 내가 지금처럼 뭘 알 때가 아니다. "아이고~~ 내가 못 살아! 누가 이렇게 하랬어~" 일단 고함부터 질렀다. 두 녀석은 요리조리 피하면서  깔깔대기 바빴다. 나는 한숨을 푹 푹 쉬며 다 닦아낸 뒤 집안일을 하려고 또 둘만 남긴 채 "이 방 안에서 벌을 받고 있어!" 라며 방문 손잡이를 꼭 당겼다. 평소보다 더 확실하게.


  손자 어멈이 비명에 가까운 울음이 내 귀를 때렸다, 아차! 싶었지만, 장난이 심했던 어멈이라 '이 녀석이 꾀를 부려?' 하면서 방문을 열지 않았다. 아차! 번개 같은 불길함에 부리나케 문을 열었다.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장면을 마주하는 순간 "엄마가 잘못했다. 마이 아프제? 미안해, 미안해." 저절로 눈물이 쏟아지며 앞을 가렸으나 얼른 아이의 손을 내 입에 갖다 댔다. 내가 문을 닫을 때 안 쪽 문설주에 딸이 손을 대고 있는 것을 몰랐다.


  나의 미련함에 내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어멈을 안고 손가락을 혀로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통증이 가라앉으라고. 딸은 천진난만한 아기였다. 아픔이 사라지자 이내 헤헤 거리며 자박자박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놀랐던 후동이도 안정이 되었는지 함께 낄 낄 거리며 안 아프냐고 묻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딸에게 새끼손가락을 구부려 보라고, 손목 관절도 움직이도록 해봤다. 세상천지 물정 모르는 쌍둥이 엄마 눈에도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남편은 1982년 김포공항에서 근무했다.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으면 못 사는 동네', 서울 한 귀퉁이 황토 먼지가 날마다 일다시피 하였고, 비가 오면 사흘들이 진흙 밭에 빠지는 것이 예사인 곳, 수도배관이 설치되않은 관사서 1년을 살았다. 나는 혼인 2년 초보 엄마로서 쌍둥이 딸과 함께 성장하던 시절이다. 남편은 부하 두 명지프차에 태워서 관사로 보내주었다. 내가 어멈을 안고, 한  병사가 후동이를 안은 채 김포 정형외과로 나갔다. 남편은 나라에 충성하느라 아이 데리고 병원 근처 그림자도 얼씬 하지 않았다.  


  손자는 어멈이 눈에 뜨이자 엄마에게 가려고 했다. 나는 급작스럽던 상황이 종료되었기에 사위에게 '아무리 황당하더라도 대범하게 행동해라, 그리고 미쳤다는 곱지 않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하얀 천에 잉크가 흡수돼 듯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손자다. 조그만 언행이라도 신경 써서 해야만 한다고 또 강조를 했다. 사위가 놀란 토끼마냥 떨어대더니 겨우 정신을  차렸다. 사위는 온실 안 식물처럼 자란 티가 줄 줄 흘렀다.


  나는 다시 쓰던 일기를 마저 쓰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늦은 혼인으로 인하여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아주 적다고 여겨졌다. 우리들이 적게 낳아서 키우던 자식이다 보니 부모 특히 엄마가 다 해주며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엄마가 몰라서라기보다 답답하여서 내가 잡아주는 것이 빠르니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는 구태여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데리고 사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태서 손자까지 키워주는 세태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딸의 아파트에서 조손(祖孫) 3대가 함께 살며 융화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융화를 배워가고 있다. 어른인 우리 내외가 물러서는 시점, 딸 내외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을, 네 사람의 화목한 모습은 손자에게 안정감과 평화로운 가정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산교육이었다. 이러니 어찌 손자 앞에서 함부로 언행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손자에게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없다. 내 손자는 식사 때 우리들과 같이 먹고 싶어서 매달리고 내게 마구 달려든다. 밥상머리 교육이 필요한 시기가 된 것 같다.  




사진: 정 혜



  눈 덥힌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


  백범 김 구 선생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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