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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an 16. 2021

큰 별만 성글게 보일 뿐

   음력 동짓달 열나흘, 보름달이 해의 흔적조차 밀어냈다. 황악산 중턱 암자의 양력 섣달 초저녁, 달빛이 환하지도 않은 대웅전 마당을 거닐었다. 동녘에서 떠오른 산속의 달은 남으로 향하면서 어둠이 짙어졌다. 산골짜기의 냉기가 내려앉으며 기분 좋게 코 속을 파고 들어왔다. 소나무 향이, 마른 낙엽의 냄새도 시원했다. 자갈 밟히는 소리는 바닥을 살며시 디뎌도 숙덕거렸다. 별이 성글게 하나씩 얼굴을 보였다. 손자가 있는 아파트에서도 보름달은 보이리라. 도심의 하늘에는 별은 보이지 않고 인공위성만 달 주변을 서성인다.      


  "다아~알" 손자가 어설픈 발음으로 달을 손가락질했다. 거실 창으로 주홍의 달이 밝게 떠서 우리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나는 손자의 한 손을 잡고 달을 맞이하려고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손자가 달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나는 손자와 초저녁달을 찾아서 얼굴을 창에 바짝 갖다 대며  "어, 저기 달이 있네! 보름달이네~" 손자도 손으로 달을 가리켰다. 딸의 아파트는 남서향이라 초저녁에 뜨는 달은 거실 창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낮달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하였다. 손자도 나의 손끝을 따라왔다. 우리가 산책 중에 만난 하얀 반달.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 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마할 때 치마끈에 달랑달랑 채워줬으면~" 유모차를 세워둔 채, 나는 사진을 찍으며 '반달' 동요를 불러 주었다. 아니 내가 어릴 적 부르던 노래가 생각이 나서 불렀다. 


  손자가 마침내 혼자 발걸음을 뗐다. 15개월을  며칠 앞두고 서다. 이 아이는 생후 4~5개월이 지나면서 나더러 걸리라고 마구 몸을 움직였다. 손자의 양쪽 겨드랑이에 내 손을 넣어 곧추 세우고, 나는 허리를 굽혀서 걸리면 다리에 힘도 오르지 않은 녀석이 좋아라 날아다녔다. 할머니가 힘이 부쳐 헐떡여도 또 하라는 것이다. 목욕을 하고 난 후 눕힌 채 로션을 바르면 어른의 양손 검지를 잡고서 발뒤꿈치에 힘을 주며 한 순간에 그대로 일어서버렸다. 어미나 내가 놀라 뒤로 넘어갈 정도였다.


  그런 녀석이었기에 빨리 걸을 줄 알았다. 지 어멈은 10개월 만에 발자국을 뗐으니까 가능하리라 짐작했으나 도무지 나의 두 손을 놓지 않고 걸음마를 했다. 보행기를 붙들고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밀며 걸음을 연습하던 녀석이 보름 가까이 지나자 잰걸음으로 쿵 쿵 거리면서 달리다시피 했다. 한 번은 어미와 내가 손자의 양손을 잡고 걸었더니, 이 녀석이 걷는 둥 마는 둥 성큼성큼 내달았다. 


  나는 손자의 두 손을 만세 부르는 자세로 뒤에서 잡고 걸음을 걷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허리가 아파서 오래 걸리는 연습을 할 수 없다. 내가 살그머니 손자의 한 손을 놓았다. 손자는 불안한 듯 이 삼일은 한 손을 위로 든 채 뒤뚱거리면서도 중심을 잘 잡았다. 어린 아기였지만 겁이 많아서 함부로 행동하는 예 가 없다. 신중히 잡은 뒤 만지면서 느끼고 확인한 후에야 행동으로 옮겼다. '이 아이가 곧 걸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손자가 드디어 스스로 발을 떼면서부터 넓은 실내를 돌아다녔다. 할머니 손을 잡고 걷지 않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무척 신기한 모양이다. 1미터가 2미터로 늘어나더니 더 멀리도 왔다 갔다 하였다. 나는 그저 그런 손자가 신통하고, 손자는 스스로도 대견한 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보행기는 나와 술래잡기하면서 급히 달아날 때 양 손으로 붙든 채 이용했다. 서서히 걷기 보조 도구 또한 손자에게서 멀어졌다.


  손자는 복도를 오갔다. 나는 문득  붓다께서 성도(成道)하시던 그날의 기쁨이 저랬을까.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저렇게 걸으시면서 열락에 젖으셨겠지. 붓다는 진리를 발견한 뒤 다시 점검하면서 확인하며 승리자로서의 그 충만함을 내 어찌 짐작이나 하리오. 내 손자가 저리 감격하여 왔던 길 돌아서서 걷는 저런 기분이었을까. 감히 갓 걸음을 떼는 세간의 아기와 성도를 이룬 후 내딛는 출세간의 발걸음이 어찌 같을쏘냐만. 


  나는 밝아지는 달빛을 벗 삼아 느껴보고 싶었다. 손자도 보고 있을 저 보름달 아래서 대웅전 뜰을 거닐며 다 잊어버린 걸음마의 소회를 맛보려 예까지 오지 않았나. 그러나 나는 붓다를 닮으려는 사람이지 결코 아기처럼 걸음마를 시작하여 날마다 새롭게 뜨는 달이 아니었다. 이미 져버린 과거의 달을 찾으려니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땅을 디디는 나의 발자국마다 자그락, 자그락 소리만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한 할머니가 그저 뒷짐진 채 하늘을 바라보며 느리게 걸을 뿐이다.     



사진: 정 혜

2020년 12월 30일 밤 10시 19분에 보름달 빛을 피해서 찍은 별의 모습이다. 큰 별만 성글게 보였다.


대문 사진은 12월 31일 아침 6시 1분에 찍은 북두칠성이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209287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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