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매(觀梅)

by 정 혜

Day 22 당신이 기존에 쓰신 글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글 한 가지를 퇴고해 주세요.



심홍 빛. 점점이 무리 지었다. ‘무슨 꽃이 저리 고울까‘ 빛깔이 도발 적이다. 범어4거리 대로변 한 지점이 화려했다. 버스 안이었지만 엉덩이가 들썩였다.


어머니와 더러 오가던, 입맛이 모래 씹는 것 같다고 하셔서 육회를 먹으러 왔던 식당 앞이다. 마음이 짠했다. 종종 지하철 범어 역에서 만나 헤어지던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으로 흔들리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꼿꼿했다. 돌아서서 범어 지하도 4번 출구로 나가면 어머니께서 다니던 한의원이 있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어머니 발자국이 한의원까지 이어진 것 같다. 어머니와 내가 밟았던 길이다.


2월 초순이면 눈여겨본다. 중순에는 꼭 와서 개화여부를 확인했다. 2019년 올해는 음력 설밑부터 꽃이 피었다. 양력 1월말 즈음 성질 급한 녀석들은 먼저 꽃받침을 헤치고 나왔다. 몇 송이가 높은 가지에만 꽃을 피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태 전까지 흰 수염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던 곳, 재건축한다며 다 허물어버리고 임시담장을 쳐두었다. 나무가 있는 화단은 누런 포대기에 가려져 옴짝달싹 하기 어려웠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사진을 찍으려 해도 빛 조절이 되지 않았다. 또 지나가는 사람들이 화단아래 구석진 곳에 담배꽁초와 빈 음료수 통, 종이와 비닐을 던져 두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나는 꽃향기를 느끼려니 갑갑하고, 사진조차 찍을 수 없어 감질(疳疾)이 났다. 때마침 승용차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주차장 건물에는 어머니가 위로받던 한의원이 있다. 어머니께서 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듯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지난해도 여기서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가 한의원 친구들과 나오다 나랑 마주쳤다. “야야, 니 여서 뭐하노?” 어머니에게 따로 할 말도 없고 하여 “얼른 가이소. 사진 찍어야 됩니더” “형님 따님이네. 우리 먼저 가까예” “저 분들 하고 같이 가시소, 재밌는 시간 보내이세이” 매화 사진 찍는다는 핑계로 어머니 등을 떠다밀었다. 매향이 더 중요했고, 사진 찍는 것이 급선무였다.


범어 4거리, 지하도 4번 출구 가까이 피는 꽃은 홍매였다. 나는 분홍색이 짙어서 ‘흑매’라고 부른다. 흑매 나무가 대구시내 중심 그것도 자주 다닐 수 있는 곳에 심어져 쾌재를 불렀다. 향내가 나를 사로잡았다. 신선하고 상큼하며, 달큼한 내음은 가벼웠지만 가볍지 않았다. 무겁지 않으면서 무게가 느껴졌다. 진하게 향을 느끼고 싶어 습관대로 꽃가지를 코에 댔다.


녹악매가 8번 출구 지근에 있었다. 녹악매는 범어도서관 옆 언덕으로 오르면 D 아파트 주차장 입구 화단에 색시처럼 다소곳이 서있다. 범어배수지가 있는 야산을 넘어서 집으로 가려던 참에 우연히 흰 점, 점들에게 이끌렸다. 폭 6미터 도로 건너에서 달착지근하니, 산뜻하면서도 잔잔한 향내가 느껴졌다. 길을 건너며 “곁에 있는 것처럼 향기 나는 사람, 이거였구나.” 그래도 나는 꽃가지 하나를 당겨 얼굴을 묻었다. 마법에 끌리듯 마주한 정체는 백매였다. 꽃받침이 녹(綠)색이며, 꽃받침 악(萼)을 써서 ‘녹악매(綠萼梅)‘라는 별칭을 가진 매화다. 특이하게 꽃받침이 하얀 꽃잎 다섯 장에 파르스름하게 비쳤다. 올망졸망한 꽃봉오리가 꽃받침에 폭 싸였다. 꽃받침은 연한 녹두 빛, 봉오리는 미색으로 오묘했다. 나무전체가 초록가지마다 미색꽃잎에 녹두 빛이 반사되어 푸른빛이 감돌았다. 50층 고층건물 뒤쪽 그늘에서 피어난 매화는 신비로웠다. 품격이 달랐다. 또 가지들 빛깔과 굵기가 다른 것이 신기했다.


매실나무 가지는 곧게 위로 뻗는다. 해묵은 잔가지라도 굽은 것은 없다. 사선일망정 똑바로 자란다. 그리고 새로 난 줄기는 새파랗다. 초록색 새가지는 그 해부터 꽃을 피우지 않는다. 두 해 지나야 봉오리가 달렸다. 삼 사 년 이상 된 가지는 초록이 짙어지면서 갈매색으로 변하여 갈색을 띠었다. 갈 빛 가지가 굵어지면서 표피가 갈라져 나이 먹은 티를 내기 시작했다. 신구(新舊)가 함께 꽃을 피웠다. 만개했을 땐 나와 꽃들과 향내의 축제장이 되었다. 몇 년 전 딸의 하계모임에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세 모녀가 참석했다. 두문불출하던 어머니에게는 축제나 다름없었다. 우리들은 세 번의 여름을 함께 했고, 전대미문의 일이 될 것이라며 전회원의 부러움을 샀다. 쌍둥이가 외할머니께 키워준 선물로 1박2일 휴가에 동참시켰던 것이다. 모녀 3대가 두 딸의 주선으로 일본여행까지 다녀왔다.


그랬다. 매화는 묵은 가지에서 꽃을 피웠다. 내가 쌍둥이를 낳던 해, 당신의 딸이 고생한다며 안쓰러워서 손녀를 한참 키워주셨다. 이 손녀가 태중에 증손을 키우고 있다. 외할머니는 비록 몇 개월 전 고인이 되었지만, 나는 오랜 가지에서 해마다 손주 꽃을 피우는 흑매와 녹악매를 만나고 있다. 빳빳하게 뻗은 가지는, 뼈와 가죽이 옷에 덮여서 움직이는 어머니의 꺾이지 않는 자존심을 보는 듯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위신이 우선이었다. 당신의 가지를 잘라내며 해가 가기를 기다렸다. 얇았던 껍질이 찢겨지는 아픔을 감내하였고, 살갗은 터지면서 두터워졌다. 갈매색이 거뭇거뭇 하게 변해져도 가지를 길러냈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했다. 어머니도 그랬다.


어느 해 3월 하순, 작은 딸과 순천 송광사로 갔다. 흑매는 보이지 않고 점묘법으로 묘사한 나무그림만 있었다. ‘흑매‘의 꽃 색을 짐작만 하고 돌아섰다. 이후, 퇴계 선생님의 ’매화에 물 주어라“ 유언과 함께 화두가 되어 나의 탐매(探梅) 여행이 이어졌다. 매화가 근방에 피면 향이 느껴져 찾아서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 그러다 범어도서관 인근에서 녹악매를 만났다. 대구 매여동, 전남 송광사, 선암사, 경남 하동 쌍계사 등지로 발길이 닿는 곳에서 매화공부를 했다. 그러나 재작년부터는 범어배수지 맞은편에서 관매(觀梅), 매화를 보며 향기에 젖었고, 희희낙락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꽃내음을 기억해두려 심호흡을 하면서.


쇄락(灑落)한 향이 은은하게 주변을 맑힌다. 멀리 있어도 지척에 있는 것 같은 존재감. 연한 녹두 빛으로 미색 봉오리를 감싼 조화. 꽃받침 하나가 5꽃잎을 아우르는 배려. 오래되어 거칠게 벌어진 틈새로 새가지를 길러 함께 꽃을 피우는 가족공동체. 그늘진 뒷길에서 꽃을 피워도 당당하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 꽃을 피워서 곤충과 인간을 이롭게 하는 자비. 난 이런 희망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매화가 필 줄만 알았지 노목(老木)의 외로움을 모르는 것 같다. 자식에게는 내리사랑만 있었고, 노모에 대한 치사랑은 마음뿐이었다.


아, 며칠 전 지인이 녹악매 사진을 본 후 나와 어울린다고 했다.




주) 매화의 꽃받침은 대부분 홍갈색이다.

흑매는 연분홍 꽃잎이 빨간 자주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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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 혜.


대문 사진: 흑매


아래 사진: 홍매와 녹악매.



*이 글은 2019년 3월 '희망봉 광장' 문인협회 주관 신인상 공모전 수필 부문 당선 작품 입니다.*




댓글 20 공감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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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27. 2020

노모에 대한 치사랑이 마음뿐이라는 말씀이 참 아픕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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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삶 Oct 27. 2020

불교뿐 아니라 꽃도 전문가시네요. 매화를 이렇게 가까이 찍은 사진은 처음 같아요. 참 예쁘네요. 마음이 편안해 진달까요. 외할머니의 사랑과 손주와의 관계를 매화 꽃에 비유하여 설명해 주셔서 공감도 되고 그 사랑과 감사가 전해집니다. 멋진 매화 사진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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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돌의 책 글 여행 Oct 28. 2020

매화는 묵은가지에서 꽃을 피웠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애닯게 느껴지네요~ 내리사랑이게 되는 우리 마음도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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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Oct 29. 2020

@공대생의 심야서재

ㅎㅎㅎ
세월이 지나면서 그 마음마저도 희나리 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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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Oct 29. 2020

@일과삶

몇 년을 매화에 치중되어 관찰과 습작을 제법 했답니다.
그 결과물이랍니다.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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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Oct 29. 2020

@옥돌의 책 글 여행

내리사랑은 우리네 인생인 것 같습니다.
식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해 우리네 인생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어요.

좋은 오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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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Oct 29. 2020

편지노트/새삼 매화가 새삼 우아하고 기품있는 꽃이라는 걸 느끼게 되네요무관심하게 지나쳤는데 이렇게 보 니 새롭게 .와닿습니다.관찰력과 묘사가 돋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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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북 Oct 29. 2020

매화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글은 처음 읽었어요.

꽃을 통해 인간사를 풀어 내시니 더 재미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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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gogo Oct 30. 2020

매화에 대한 참사랑이 물씬풍기네요

내리사랑은알아도치사랑을모르거살죠
자식들한테만 매여 돌아보니 부모님 천국으로 가셨네요
있을때 잘해야하는데 말입니다.
글잘읽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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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약수 Oct 30. 2020

어머니 사랑을 매화와 연관지여 묘사하니 더욱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관심분야가 넓고 다양하면 깊이까지 담보하기는 힘든데, 작가님은 관심 두는 분야에 대해 깊이 파고들며 공부하는 학구파시니 항상 놀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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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Oct 31. 2020

@강지원

편지노트님, 고맙습니다.
새 해에는 매화의 향에 빠져보시기를 강추합니다.
직접 느껴보면 그 매력에 푹 젖어 들 것 같습니다.
11월의 글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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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Oct 31. 2020

@하이북

나이가 들어가니 주변 식물에 관심이 많아지네요.
가까이 가서 향을 느끼고, 관찰하게 되면, 우리 인생과 별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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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Oct 31. 2020

@gogogo

맞는 말씀입니다.
생존해 계실 때 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늦었지만 자식들에게 받은 사랑을 베풀되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 잘 보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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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Oct 31. 2020

@상선약수

살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요.
본받아야 할 분은 상선약수 선생님이시지요.
몇 년 간 관찰하며 여러 번 습작하면서 나온 글이랍니다.
관매로 등단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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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마녀 Nov 02. 2020

작가님의 글에서 관매와 탐매로 제대로 매화를 즐긴 듯 해요.

어머니와 매화를 연결하신 모습이 멋지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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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Nov 02. 2020

@꼬마마녀

작가님께서 그리 평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11월 한 달도 좋은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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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베짱이 Nov 02. 2020

노모에 대한 치사랑은 마음뿐이었다.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만 남았다.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더욱 공감이 가네요. 세월이 흐르면서 거리가 중요함을 느끼는데... 그 거리를 정할 수가 없네요. 거리를 정하려는 시도가 우스운 걸지도 모르겠네요.

매화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잘 읽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전 살면서 매화 꽃을 보지 못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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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Nov 02. 2020

매화는 꽃잎도 예쁘지만 꽃술이 화려해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돼요. 매화와 벚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가와 알려주시던 엄마와의 추억이 생각납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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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우 Nov 03. 2020

작가님을 보면 항상 주변의 소소한 것이라도 주의깊게 디테일하게 관찰하시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관록이란 냄새도 풍기는 듯 합니다. 디테일한 능력이 많이 부족한 저로서는 배우고 싶은 점입니다. "자식에게는 내리사랑은 있어도, 노모에게 치사랑은 없다" 내리 사랑만큼 치사랑도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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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몽 Nov 04. 2020

짱짱짱~~!!! 정혜님의 꽃글은 꽃보다 아름다고 향기롭네요. 여러번 다시 읽게 되요. 읽다보면 제가 보았던 꽃들도 떠오르고... 냄새가 어디선가 ~~~ 납니다. ^^



Oct 27. 202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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