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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Sep 05. 2021

느그오빠 같은 사람도 없데이

 

  예민한 손녀를 업어서 겨우 재웠다. 조심스럽게 아기 침대에 모로 눕히니 꼼지락거렸다. 손녀의 해사한  두 손을 지그시 맞잡은 채, 한 손으로 아기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어멈은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면서 아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이 오히려 잠재우는 손녀를 더 꼬물 락 거리게 만들었다. 엄마의 말은 아랑곳없이 손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녀를 재우는데 공을 들이는 나로서는 손자가 70일을 넘긴 동생 옆으로 오는 것이 결코 반갑지 않았다. 손자의 새청맞은* 고음이 잠들려는 손녀를 깨워서 울리기 이미 차례 겪었기 때문이다.


  손자는 샘바리*다. 생후 21개월 만에 만난 여동생을 향한 은근한 강샘*이 이만저만 아니다. 내가 손녀를 안으면, 손자는 나의 등에 머리를 비비면서 오른손은 중지와 검지를 동시에 입 안에 넣고 쫍쫍 거리며 빤다. 왼손은 앞으로 뻗어서 내 젖꼭지를 조몰락거린다. 한 번에 못 찾으면 젖꼭지 찾느라 마구 더듬거린다. 이러는 손자가 예뻐서 손녀 안은  자세를 고쳐서 앉기도 한다. 이 녀석은 적극적으로 나의 빈자리를 노리고 파고들어서 나를 탐한다.


  손자는 드레* 있는 아이다. 손녀가 쪽쪽이를 물고 있는 것을 보더니 느닷없이 뽑아냈다. 어멈이 아래, 위가 없어 쪽쪽이를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말문이 터진 손자가 내게 뭐라고 하면서 손녀에게 다시 물려주었다. 그제야 어멈이 고니 그림이 그려져 있는 쪽쪽이를 바르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고니 한 마리가 손녀 코 밑에서 놀았다. 


  요즘 '혼불' 책을 읽고 있다. 며칠 전 손자와 산책 나가는 어멈에게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빌려오라고 부탁했다. 어멈은 반납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의 머리맡에 서재에 있는 혼불 1권이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손자를 데리고 도서관에서 놀며 책을 빌려와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랬는데 손자가 '할머니 읽는 책'이라며 책장에서 꺼내다 주었다. 손자는 비록 나이 어리지만 웅숭깊이가 있었다 


  이런 손자가 아기 침대 가까이 오면서 "마음" 하면서 예의 하이 소프라노로 노랠 불렀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태명까지 불렀지만, 나는 '조용하라' 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손자를 뒤로 밀었다. 접근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이 샘바리가 목청껏 고음불가에 도전했다. 사로잠*을 자던 손녀는 두 손발 마구 흔들어대면서 지 오래비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쌍나팔을 불었다. 딱히 별 수가 없어서 손녀의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두 손주의 고성방가는 나를 갑자기 더 덥게 만들었다. 땀이 치솟으며 얼벙거지*가 느껴졌다. 벗겨낸 기저귀를 마무리하여서 화풀이 삼아 휙 던져버렸다. 손자는 내버려두고 누운 손녀와 눈을 맞추면서 "그래도 느그 오빠 같은 사람 없데이~" 손자 같은 오빠는 확실히 없다.


  손자의 새청맞은 소리가 숙졌다. 종이기저귀를 둥글게 말아서 문 밖으로 던질 때 아차 싶었다. 자주 손자 손에 기저귀를 지어주며 쓰레기 통에 버려달라고 하면 장력세게* 화장실로 걸어가서 처리해주었다. 이 녀석에게 "마음이 오빠야, 저기 기저귀 쫌 버리 줄래?" 손자는 서슴없이 기저귀를 향해 가더니 발로 툭 걷어차면서 나를 바라보며 히쭉 웃었다. '내가 던지는 기 아인데… 저거를 사람이라꼬…' 손자는 동생에 대한 몽니*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게염*이 없다면 아이답지 못하다고 누가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손자는 21개월 동안 부모와 양가 조부모, 이모, 고모, 외삼촌 및 집안 어른들에게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 사랑은 온전히 하나가 아닌 둘 임을 파악했던 것이다. 동생에게로 가는 사랑을 돌리기 위해 갓난아기로 퇴화해버렸다. 어멈이 손녀에게 젖을 먹이면 손자가 내게로 와서 안기며 손가락을 빨고 젖꼭지를 꼬집듯 잡았다. 내가 아기를 업고 소파에 앉으면, 앞으로 와서 머리를 가슴에 묻으며 손가락을 짭짭거렸다.  


  '사랑이 저만치 가네'는 단지 느낌이다. 미상불 손자는 떠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구월 구일이면 두 돌인 손자의 찌그렁이*가 그렇다. 언젠가 작은 시누이가 연년생을 키웠던 자신이 쌍둥이 키운 나보다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즉시 모르는 말 하지 말라고 반박했던 적이 있다. 살면서 내내 잊히지 않았다. 자신의 힘든 점은 내세우면서 나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야속했던 것이다. 내 손주를 키우며 쌍둥이보다 연년생 키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가끔 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또한 주변에서 연년생이나 비슷한 터울로 키우는 엄마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나의 쌍둥이는 두 돌이 지나도 시샘 같은 것이 적었다. 그리고 분유만 제 때 먹이면 둘이 잘 놀았다. 힘이 드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연년생은 두 녀석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작은 아이 젖 먹이면 큰 애는 엄마에게 달려들어서 헤살을 놓는다. 아니면 앙살을 부리며 이악스럽게 사랑을 요구한다. 낮잠이 유일한 해방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년생 엄마는 잠시도 아이에게서 손을 놓을 수 없다. 집 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참으로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임을 알았다. 


  이미 육아에서 벗어난 나다. 어쩌다 보니 손주를 어미보다 열성적으로 돌보는 처지에 놓였다. 쌍둥이 어멈과 여섯 살 터울의 늦둥이 아들을 키우면서도 손자의 시샘 같은 것은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근래 나의 하루 일과가 손주들을 번갈아 안고, 업고, 어르며 데리고 노는 것이 굉장히 벅차다. 한마디로 헤어지면 그리운 이 분들과 멀어지고 싶은 것이 소원이다. 어멈이 나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디 만만한 친정어머니 같은 돌보미가 있나. 어린 남매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나의 바람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이지 싶다. 내가 갚아야 할 빚이 딸, 손자, 손녀에게 아직 많아서라고 자위한다.     


  많은 나이 차이가 나도 샘을 내는 것이 자식인 것 같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이미 정답으로 나와 있다. 옛 어른들의 진한 경험담은 한치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도 내 손주를 통해서 배우며 산다. 손주가 내겐 선지식이다. 또 자식을 많이 낳아서 키웠던 부모 세대들이 더 어렵고 힘들게 자식들을 키웠을 것으로 사려된다. 오히려 자식이 하나 아니면 둘인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를 감당 못해서 '베이비 씨터'니 도우미를 찾고 있다. 참으로 모순된 사실이 아닌가.

  


*새청맞다(목소리가 높고 날카롭다)

샘바리: 어떠한 일에 샘이 많아 안달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

게염/개염(시샘)

강샘(질투) 

사로잠(마음 놓고 자지 못함)

웅숭깊다(생각, 뜻이 크고 넓다) 

드레(인격적인 무게) 

얼벙거지(매우 급하게 치미는 화증)  

장력세다(씩씩하다) 

찌그렁이(억지로 떼쓰는 짓)

미상불(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숙지다(어떤 현상이나 기세 따위가 점차로 누그러지다.)

해사하다(희고 곱다랗다)

몽니(권리 주장 위해 심술 부림)

이악스럽다(끈덕지다, 이익을 위해 노력)

앙살스럽다(엄살피우며 겨루는 태도)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아파트 단지 화단에는 동백이 익어가고 있다. 빠른 것들은 벌써 씨앗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두꺼운 껍질이 벌어진다. 열매 끝에 암술 꼬리가 남아 있다. 짐작컨대 자손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을 것 같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내 손자도 저렇듯 우리들 가까이 다가왔다. 손자 또한 그럴 것이고.


아래 사진: 아기띠로 손녀를 안아서 재웠다. 1분이라도 더 재워보려고 내가 끼고 누웠더니 손자가 파고 들었다. 손자가 나의 젖꼭지를 만지는 위치와 각도가 맞지 않아서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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