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의 새청맞은 소리가 숙졌다. 종이기저귀를 둥글게 말아서 문 밖으로 던질 때 아차 싶었다. 자주 손자 손에 기저귀를 지어주며 쓰레기 통에 버려달라고 하면 장력세게* 화장실로 걸어가서 처리해주었다. 이 녀석에게 "마음이 오빠야, 저기 기저귀 쫌 버리 줄래?" 손자는 서슴없이 기저귀를 향해 가더니 발로 툭 걷어차면서 나를 바라보며 히쭉 웃었다. '내가 던지는 기 아인데… 저거를 사람이라꼬…' 손자는 동생에 대한 몽니*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게염*이 없다면 아이답지 못하다고 누가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손자는 21개월 동안 부모와 양가 조부모, 이모, 고모, 외삼촌 및 집안 어른들에게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 사랑은 온전히 하나가 아닌 둘 임을 파악했던 것이다. 동생에게로 가는 사랑을 돌리기 위해 갓난아기로 퇴화해버렸다. 어멈이 손녀에게 젖을 먹이면 손자가 내게로 와서 안기며 손가락을 빨고 젖꼭지를 꼬집듯 잡았다. 내가 아기를 업고 소파에 앉으면, 앞으로 와서 머리를 가슴에 묻으며 손가락을 짭짭거렸다.
'사랑이 저만치 가네'는 단지 느낌이다. 미상불 손자는 떠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구월 구일이면 두 돌인 손자의 찌그렁이*가 그렇다. 언젠가 작은 시누이가 연년생을 키웠던 자신이 쌍둥이 키운 나보다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즉시 모르는 말 하지 말라고 반박했던 적이 있다. 살면서 내내 잊히지 않았다. 자신의 힘든 점은 내세우면서 나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야속했던 것이다. 내 손주를 키우며 쌍둥이보다 연년생 키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가끔 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또한 주변에서 연년생이나 비슷한 터울로 키우는 엄마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나의 쌍둥이는 두 돌이 지나도 시샘 같은 것이 적었다. 그리고 분유만 제 때 먹이면 둘이 잘 놀았다. 힘이 드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연년생은 두 녀석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작은 아이 젖 먹이면 큰 애는 엄마에게 달려들어서 헤살을 놓는다. 아니면 앙살을 부리며 이악스럽게 사랑을 요구한다. 낮잠이 유일한 해방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년생 엄마는 잠시도 아이에게서 손을 놓을 수 없다. 집 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참으로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임을 알았다.
이미 육아에서 벗어난 나다. 어쩌다 보니 손주를 어미보다 열성적으로 돌보는 처지에 놓였다. 쌍둥이 어멈과 여섯 살 터울의 늦둥이 아들을 키우면서도 손자의 시샘 같은 것은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근래 나의 하루 일과가 손주들을 번갈아 안고, 업고, 어르며 데리고 노는 것이 굉장히 벅차다. 한마디로 헤어지면 그리운 이 분들과 멀어지고 싶은 것이 소원이다. 어멈이 나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디 만만한 친정어머니 같은 돌보미가 있나. 어린 남매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나의 바람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이지 싶다. 내가 갚아야 할 빚이 딸, 손자, 손녀에게 아직 많아서라고 자위한다.
많은 나이 차이가 나도 샘을 내는 것이 자식인 것 같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이미 정답으로 나와 있다. 옛 어른들의 진한 경험담은 한치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도 내 손주를 통해서 배우며 산다. 손주가 내겐 선지식이다. 또 자식을 많이 낳아서 키웠던 부모 세대들이 더 어렵고 힘들게 자식들을 키웠을 것으로 사려된다. 오히려 자식이 하나 아니면 둘인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를 감당 못해서 '베이비 씨터'니 도우미를 찾고 있다. 참으로 모순된 사실이 아닌가.
해사하다(희고 곱다랗다)
몽니(권리 주장 위해 심술 부림)
이악스럽다(끈덕지다, 이익을 위해 노력)
앙살스럽다(엄살피우며 겨루는 태도)
대문 사진: 아파트 단지 화단에는 동백이 익어가고 있다. 빠른 것들은 벌써 씨앗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두꺼운 껍질이 벌어진다. 열매 끝에 암술 꼬리가 남아 있다. 짐작컨대 자손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을 것 같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내 손자도 저렇듯 우리들 가까이 다가왔다. 손자 또한 그럴 것이고.
아래 사진: 아기띠로 손녀를 안아서 재웠다. 1분이라도 더 재워보려고 내가 끼고 누웠더니 손자가 파고 들었다. 손자가 나의 젖꼭지를 만지는 위치와 각도가 맞지 않아서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