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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an 08. 2022

무정하다, 괘씸하다

  새벽 4시 30분 부처님을 찬탄하는 예경으로 하루의 문을 연다. 한 시간의  경행을 마치면 바로 좌선 자리에 앉는다. 다시 경행과 좌선을 반복한 뒤 12시 전에 점심식사를 마친다. 휴식을 취한 뒤 오후에도 두 차례, 저녁식사는 하지 않고 좌선과 경행을 한 번 더 진행하는 '집중수행'에 동참했다. 수행처는 경주의 어느 골짜기로 무려 4박 5일 무작정 떠났다.


  대문을 나서면 잠들기 어려워서 고생이 무지무지하다. 첫날밤부터 진앙지가 경주 내남면 박달리에서 강력한 지진을 만났다. 강진 규모 7.5의 고통이 엄습해왔다. 그 괴로움은 언설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 상상도하지 못할 만큼 곁에 누운 사람은 괴롭다. 집에 있는 소주 생각이 절로 났다. 혹시 숨겨놓고 먹는 술이라도 있을 것 같아 공양 간을 몰래 뒤져보고 싶은 욕구마저 강하게 일어났다.


  선원(禪院)은 계율을 엄격히 지킨다. 어떤 사람은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 가서도 새우젓을 먹는다고 했다. 소주라는 값싼 술이 있을 리 만무한 철저한 수행 처이다. 아무리 눈치 9단이라도 새우젓은커녕 술은 언감생심이다. 소주잔으로 반만 마시면 잠 선(禪)에 빠져져 이승인지 저승인지 구분도 못할 건데 말이다. 없는 소주가 굉장히 그립다. 이렇게 사무치게 그립다니… 한 모금이면 저 지진의 후폭풍이 뱃노래 가락처럼 들릴 텐데… 귀 속을 검지로 막았다. 조용히 쌔근거리며 잘 자는 친구의 딸에게 방해가 될까 몸부림도 제대로 치지 못하겠다. 살며시 돌아누우면서 몸을 웅크려 이불로 진앙지와의 차단을 시도했다. 다 소용없다. 벌떡 일어나 제발 코 골지 말라고 흔들어댈까 보다.


  남편은 애주가다. 그가 술에 먹혀서 들어오는 날이 많을수록 주류에 대한 거부감은 비례했다. 한 모금이라도 나의 체내에 흡수되면 얼굴이 붉어져서 자제했다. 거부와 자제(自制)는 모두들 좋아하는 그 증류주에 더 약해졌다. 먹고 싶었다면 그 어떠한 이유도 필요 없을 것이다. 수면제도 없는 이 밤에 오로지 술 생각이 간절하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으으으. 머리를 싸매고 혼자 뒹굴었다. 침으로 귓속을 찔러 대는 것처럼 괴로운 저 무지막지한 소리를 내며 자는 그들이 정말 부럽다. 아, 무정하다. 야속하다. 괘씸하면서도 얄밉다.


  둘째 밤은 어젯밤의 예민함과 날카로움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림 했다. 또 친구들이 자면서 코를 골지 않으려는 배려가 감지되었다. 그녀들의 노력은 고마웠지만 버티지 못하고 이불과 베개를 둘둘 말아 들었다. 야반도주가 아닌 피난을 나섰다. 고문 중 최고의 고문은 잠을 못 자도록 하는 것이리라. 마음 챙김의 힘이 약하니 그 고문을 꽃노래처럼 들어 넘길 수 없는 한계가 애석하기만 했다. 피난지는 한여름의 밤처럼 더워서 숨 쉬는 자체가 새로운 고문이었다.


  코 속이 마를 대로 메말라서 땅이 갈라졌다. 차라리 귀가 찢어지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어설프게 구부리고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들랑날랑 에 자는 사람 깨울까 도둑고양이로 변신까지. 코 고는 소리를 글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써야 할지 그 연구를 했다. 다른 것을 생각하며 집중하니 다행스럽게도 고문이 견딜만했다. 두 친구는 자면서 코를 골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들은 잠 못 들어하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셋째 밤이다. 낮에 좌선과 경행을 잘하려면 눈을 붙여야만 한다. 한 시간씩 하는 수행은 충분한 잠이 선정 삼매로 드는 최고의 조건이다. 현악기의 줄이 단단하게 조여 지거나 느슨해지면 특유의 고유한 소리를 낼 수 없다. 몸도 많이 피곤하거나 긴장을 하면 수행하기 적합하지 않다. 좌선한다고 앉은 삼일의 오전은 졸음으로 메웠다. 오후에는 피로가 두 어깨를 내리누르는 참기 어려운 고통, 앉아 있는 무릎도 견디지 못하게 했다.


  40분 즈음이면 어김없이 무릎과 다리가 쑤셔대기 시작한다. 본능적으로는 벌떡 털고 일어나고 싶다. 지금 일어서고 싶은 마음을 아는 것도 나를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남편, 자식, 형제, 이웃 등에게 치솟는 분노나 욕심, 함부로 내뱉는 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알아차림으로 행동이나 행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서 참 좋다. 화가 났을 때 마음 챙김 하여 감정을 다스리면 빨리 화를 가라앉힌다. 다들 말하는 스트레스, 화 난 줄 알고 마음 챙김 하여 스스로 피 말리는 일이 없어졌다.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마음 챙김, 알아차림 하는 이 능력을 좌선과 경행을 통해서 키우려고 의도적으로 훈련한다. 날 잡아 집중수행하러 와서 적당한 몸 상태가 아니니 일초가 안타까울 뿐이다.


   남편과 각 방을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는 남편을 옆으로 돌아눕게 하면 잠시 조용하다. 이내 천정이 날아갈 듯 드르렁거리니 결국 베개와 이부자리를 질질 끌고 거실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오자 추워서 본의 아닌 각방 거처가 시작됐다. 두 사람의 이중주는 박자도 잘 맞추어 연주한다. 몇 박자의 장단으로 구성되었는지 분석까지 해봤다. 남편의 독주는 지금처럼 왜 들리지 않았을까. 단단하게만 줄을 조였나. 코골이 이중주를 들으며 결론을 얻었다. 예민했던 내가 문제였다.


  남편이 두어 달 전 나이가 많아지면 한 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서로의 안위도 확인해야 하니 함께 자자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무조건 동의할 문제다. 씹다달다 말을 하지못했다. 귀 고문을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른다. 피난 가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집에 돌아가면 합방하자고 해야 하나? 천만에, 만만에.


  넷째 마지막 밤. 선정삼매의 희열을 정말 경험해보고 싶다. 자자. 잠자자. 피곤한 몸을 뜨뜻한 방바닥에 누였다. 푹 자고 오전 수행에서 깊은 바닷속의 고요함으로 쑤욱 들어가 보자. 이 바람이 항상 있었다. 무엇을 하려 하는 바 없이 좌선에 임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조차도 의도된 욕심이라면 내려놓고 그저 앉아서 숨이 드나드는 것만 보자. 내일은 아주 작은 욕심까지도 떨쳐내고 호흡만 관찰하자.

   

  팽팽하던 줄이 드디어 끊어져 버렸다. 고단한 몸이 깊은 잠으로 유도했다. 그들의 이중창은 들을 만했다. 어느 순간부터 독창이 테너, 소프라노, 영역 구분 없이 넘나들었다. 테너의 독창은 남편이 옆에서 자는 착각을 했다. 자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며 날이 밝았다. 4일 만에 짧지만 꿀 같은 단잠을 잤다.


  지진 현장은 봉사대원들의 노력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잡념이라는 번뇌가 빠르게 알아차려진다. 몸부림치던 밤의 결과인 듯하다.


  둘째 날 아침 남편의 협조에 진심으로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김천 황악산 중턱에 위치한 중암의 추녀.  


아래 사진: 경남 하동의 칠불사 경내에서.


눈 덮인 들길 걸어갈 제

함부로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 사람의 길이 되리니


서산대사의 선시를 백범 김 구 선생님께서는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땐 모름지기 아무렇게나 걷지 말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은 반드시 뒷 사람의 길이 될지니


1948년 남북협상 차 38도 선을 넘으시면서 이 시를 읊으셨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서산대사의 시를 애송하셨다고 합니다.

알아차림 하면서 염두에 두는 시이기도 합니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61649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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