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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an 15. 2022

매화(梅花) 일기

 거뭇거뭇한 저거 뭐지. 엄동설한에도 열매가 달려 있네. 씨가 떨어지지 않은 건가. 죽은 체 매달려 있는 걸까. 해가 바뀌었는데 저리 대롱거리는 이유는 뭘까. 가지가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놓으려 하지 않을까. 어떤 여한이 남아서 저러고 있을까. 떠나지 못하는 사연이라도


  늙는 것피부가 아래로 쳐지면서 주름이 늘어난다. 또 감각기능이 하나 둘 쇠퇴하며 기억력이 현저히 감소한다. 치아가 약해지면서 사이마저 벌어지고 빠진다. 머리털도 하얗게 센다. 나이가 들어서 거동이 불편하다는 뜻일 터. 저 열매 떨어지지 않았으니 죽은 것은 아니리. 당연히 노쇠했다는 증표. 부모야 저 나무일진대 어찌 떠나지 않을


  꽃망울이 몽글몽글 생길 때부터 기쁨을 주었지. 꽃이 피어서 웃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고. 꽃잎은 떨어지고 수정이 되어서 매실 꼴을 한 열매가 달렸을 땐 신비한 생의 그 자체. 풀빛에서 초록으로 매실이 굵어지고 푸르름을 더할수록 탄탄히 속살을 채워갔지. 금 값이었어, 금(金) 값. 금 값은 인생에서 가장 푸르고 신선한 빛이며 싱그러운 향을 내뿜는 때다. 녹색으로 그늘을 드리우며 활기 넘치던 나날은 언제였나

 …  


   서서히 눈길이 가지 않더군. 더 아름답고 고혹적인 향내를 발산하는 꽃이 유혹하였으니까. 그래도 과육은 탱탱하였어. 누렇게 익은 매실의 향과 맛을 즐기려는 소수(小數)는 (銀)  값으로 모셔갔지. 그도 저도 아닌 매실은 불러줄 날을 기다리며 황금빛으로 변모하더구먼. 다수가 스스로 탈락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했고. 나무 아래로 낙과한 열매는 행인들에게 무수히 짓밟히고 으깨어지는 능욕을 당하기도     


  신축년 12월 27일 매화가 보고 싶었다. 개화 여부를 확인할 겸 산책 삼아 시찰을 나갔다. 가녀린 가지에 곧 필 듯한 봉오리를 발견하였다. 피기 직전의 모습도 단아하여 가지를 만지작거리다 순식간에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저절로 바닥으로 눈이 가면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봉오리 사진을 실감 나게 찍으려다 본의 아니게 부러뜨려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미안하다 소리를 지나가는 이들이 들을 정도로 혼자 되뇌었다.




  27일 주운 가지를 따뜻한  방으로 모셨더니 봉오리 끝에서 소란이 이는 듯. 28일 밤 11시경 문득 매화 꽃봉오리를 쳐다보니  꽃잎이 벌어지며 노란 수술마저 보인다. 대구 시내에서 설중매(雪中梅)는 언감생심이지만, 봉오리 가지를 작은 용기에 담아서 매화가 개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매실나무 곁에서 감상해야 할 꽃을 안방 화병에 꽂아두고 먼저 감상하니 천기누설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29일 아침 매향이 은은히 감돌았다. 28일 오전 10시쯤 꽃잎 끝이 약간 벌어진 것을 봤다. 봉오리가

12시간 가까이 진통을 겪으며 꽃잎이 완전히 열려서 암, 수술과 더불어 자태가 드러났다. 산고를 치렀건만 가벼우면서 상큼하고, 싱그러운 듯 담백한 향을 우아하게 풍겼다. 아직 시간 있어야 진한 매향을 흠향할 있다. 만 한 작은 봉오리 4개 하나가 매화의 그윽한 세계로 인도하였다. 내일이 기대된다. 


  30일. 계속되는 추위로 바깥의 가로수의 매화는 개화를 늦추리라 짐작된다. 내 방에는 비록 부러진 가지이지만 세 송이가 폈고, 한 송이도 며칠 내로 마저 필 것이다. 지난해부터 미리 타인들보다 봄을 즐기는 기쁨을 누리니 자긍심이 들었다. 매화와 간격이 50여 센티, 들숨에 느껴지는 매향은 달큼하다. 매화는 뭐니 뭐니 해도 향이 멀리 퍼지는 것이 매력이다. 장미처럼 진하고 강하지 않으며, 옥잠화 같은 농염한 향이 아니다.

 



  2020년에는 12월 11 산책하면서 매화를 발견했다. 이내 혹한이 몰아닥쳐 매화 꽃망울들이 일시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 개화 직전의 봉오리들이 냉해를 입었다. 어쨌거나  2021년에는 번씩 매화를 만나는 행운의 할매가 되기도 했다. 그 기억을 되살려서 11월 말부터 매실나무 가로수를 매의 눈으로 예의주시

하며 살폈다. 12월이 되면서 가장 먼저 피었던 나무를 집중적으로 쳐다봤으나 손녀가 심하게 칭얼대어 관찰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2020.12.11일에 발견한 첫 매화.  손이 시려서 곤혹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신축년 12월은 경자년 12월과 날씨가 달랐다. 겨울이 해마다 더 따뜻해져서 매화가 적어도 12월 15일 즈음이면 개화하리라 짐작하였지만 아니올시다 였다. 추위가 지난해 같지 않았다. 여우가 신 포도일 것이라며 아쉽게 뒤돌아서 가 듯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아쉬움이 컸다. 손녀를 바람 쐬어준다는 핑계로 업고서 매실나무 가로수 길로 나온다. 손녀도 손자처럼 밀당의 시련기를 거쳐야 사진을 찍건, 흠향을 하건 기다려줄 것이 아닌가.


  드디어 신축년 매화 1호가 피었다. 1월 7일, 높은 가지에 핀 딱 한 송이. 업은 손녀가 잠들기를 기다려서 뒤로 젖혀서 사진을 찍었건만 만족할 수 없었다. 애꿎은 눈 높이의 봉오리만 괴롭혔다. 그 봉오리가 곁에  애를 먹이는 할머니의 성화에 못 견뎌서 돌돌 감기어 맺혔던 꽃잎이 벌어졌다. 억지로 잔 가지를 코 앞으로 끌어당겨 심호흡을 했다. 역시 매향이야


  신축년은 1월 중순까지 추위가 이어지고 있다. 1월 12일 성가시게 집적거리던 봉오리가 벌어지면서 노란 수술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가지에는 꽃잎이 펼쳐지고 있다. 매일 영하의 날씨여서 손녀와 산책을 나가지 못하고 실내에서 용을 쓰며 서성인다. 매서운 찬 바람 속에서 꽃을 피우려는 노고를 지켜보며 할매가 함께 진통을 겪는 중이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매실나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매실.


아래 사진: 1월 12일, 신축년을 맞이하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매화. 느낌조차 한기가 느껴진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番寒徹骨):  한 번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쟁득매향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  어찌 코 안을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위의 황벽선사(禪師)의 선시(禪詩) 4연 중 3,4연은 매화의 특징을 잘 나타냈으며 압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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