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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an 29. 2022

당사주에 꺼적때기만 걸친 채

  설날이 코 앞이다. 맏동서가 계셨다면 이미 그 분과 한 대에 누웠을 무렵이다. 모두가 '시금치 시'자도 싫다고 하지만, 아무튼 해마다 동침했다. 맏동서는 매년 되풀이하는 시부모와 시가 피붙이의 얽히고설킨 애증담을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채 재생 단추 입을 누르면 자동으로 술술 돌아갔다. 그중에 시아버지가 유일하게 막내아들 집에서 하룻밤 잤다는 것은 대서특필 감이라고 막내동서인 내게 힘주어 강조하였다.


  초 하루 오전은 제각기 차례를 지내느라 분주한 시각일 때다. 맏동서의 '내가 없으면 이 집안은 엉망진창일 거야'라는 말씀과 함께 청소기 소음이 진동한다. 시동생들에게 '지난날의 회상곡'을 끊임없이 불러주면서 웃고 떠들며 정신없는 정초를 열었다. 소음이 꺼지면 '말 많은 차례상'을 다투어가며 차린다. 사람이 만든 제도에 묶여서 형제간의 기싸움은 맏동서의 기선제압으로 막을 내린다.


  남편 4형제와 조카들이 차례 상 앞에 모두 섰다. 호적에 올리지 않은 시아버지의 둘째 마나님께서 '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정월 초 하룻날 악착스레 거머쥐고 있던 두 손이 무력하게 벌어졌던 모양이다. 차례를 마저 지내면서 지인들에게 부음 보낼 여건이 아니어서 다들 난색을 표명했다. 맏동서는 "그럼 아버님 제사는 설 전날이네… 더 잘 됐네. 차례 음식에서 제사용으로 조금만 제쳐두면 되니까. 그리 알아들…" 손 아래 동서들에게 이르는 말씀이다. 


  대충 마무리하고 고려대 병원 영안실로 갔다. 시아버지는 큰 아들과 갑자기 사는 세상이 달라지자 그 충격은 두어 해 심근경색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였다. 80이 가깝도록 자식들의 용돈을 마다하고 당신이 벌어서 썼다. 자식들은 어머니를 홀대하였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컸다. 둘째 부인과 동거 중이어서 살갑게 왕래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순서 가릴 것 없이 어느 누구든 시어머니다. 그래서 둘째 부인을

"작은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라고 불렀다. 


  작은 어머니는 가끔 당사주 이야기를 했다. 어느 시 시아버지의 당사주가 그렇게 좋지 않더라는 것이다.

  "허허벌판에 꺼적때기만 걸친 노인네가 외롭게 서 있잖니, 글쎄…" 

   아들 다섯에 딸이 둘인데 외롭다니, 또 허허벌판에 거적대기만 걸쳤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 들으면서 어떤 임종을 맞을지 의문이 들었다. 허허벌판에서 매섭게 살을 에이는 바람을 맞으며 거적대기만 걸친 채 떨고 서 있는 노인네를 상상하였다. 


  그런 시어른의 주검을 보았다. 몸을 웅크리고 있었으며, 얼굴은 찡그린 채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홑이불은 발 아래 나뒹굴고. 속절없이, 보기 민망한 모습으로 떠난 주검이 참으로 허망하였다. 당사주를 떠올렸다. 저런 죽음을 의미하는 그림이었을까 하고. 40대에 시아버지를 보내면서 고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혼인하고 오래되지 않았을 때 시급히 돈이 필요했다. 항상 돈을 만지는 시아버지라서 다음 월급 받으면 드릴 테니 얼마를 융통해달라고 전화를 올렸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가 곧 전화기를 부술 것 같았다. 돈도 돈이지만, 빌려주지 않을 거면서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유를 몰랐다. 동냥은 못 줄 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그저 좋은 말로 하여도 자존심 상할 판인데…  뒷날 작은 어머니를 만나서 그날을 상기시켰다. "다 너를 위해서였다고 하더라" 개뿔 같은 말씀 한다고 일축해버렸다.


  장지는 선산. 강원도 횡성군의 오지였다. 경사가 심한 산에는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마치 삼각형에 두껍게 흰 칠을 해놓았다고 할 정도였다. 새하얀 온 산이 햇빛에 마구 반짝거렸다. 오는 길도 눈이 녹아서 질퍽거렸고, 운전도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장지 입구로 오기는 왔으나 산소까지 어떻게 운구하느냐가 쟁점이 되었다. 초 사흘이면 아직 명절 분위기로 들떠 있을 즈음이다. 횡성에서 원주는 멀지 않아서 우여곡절 끝에 남편이 원주고등학교 동기 몇 명을 불렀다. 그들이 오는 동안 마을 이장에게 사정을 하여서 상여를 빌렸다.


  4형제와 조카, 남편 동기들이 상여를 메고 산소 밑에 다달았다. 힘을 합하여 가플막진 산을 오르니 한 걸음 전진하면 주르르 평지까지 내려갔다. 다시 영차를 외치며 발을 내딛으면 몇 미터 후진하기를 얼마나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비탈에서 남자들은 상여를 내려놓고 담배를 피우며 회담을 시작하였다. 유택(幽宅)으로 가는 과정이 참으로 길었고, 험난했으며, 자손들이 힘들었다. 당신이 주선하여 매입한 선산은 결코 만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사주가 그리 틀린 것 같지 않다. 시아버지는 둘째 마나님이 맏며느리에게 전화한다고 잠시 입원실을

비운 사이 심장의 마비를 느끼면서 고통스럽게 숨이 멎은 것 같다. 혼자 황천 길로 향하였으니 허허벌판에 외로이 있는 것이요, 이 세상 올 때 발가벗고 와서 돌아갈 적엔 비록 비단 수의를 입혀도 썩으면 거적때기 걸친 것이나 다름없다. 더하여 상여에 누웠으나 혈혈단신이며, 유택에 드것도 자신만 누울 수 있다.


  2016년엔 맏동서, 2021년 둘째 시숙과도 생과 사를 달리했다. 맏동서는 대전 국립묘지 시숙 옆으로, 둘째 시숙은 천주교 매장지로 갔다. 우리 내외는 국립묘지가 이미 예정되어 있으나 남편만 보낼 생각이다. 아들에게 화장 후 남은 뼈는 갈아서 보리밥에 비비면 조그만 덩이가 된다. 그것을 산에 뿌리면 산 짐승들이 먹는다. 한 점도 남기지 말라고 했더니 그것은 자식들의 몫이라고 하여서 두 말을 하지 않았다. 


  음력 설 전 날은 시아버지 제삿날이다. 코비드 19가 5 미크론으로 변형되어서 연일 시끄럽다. 올해도 오고 가지 말자고. 딸은 손자, 손녀에게 영향이 미친다면서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다. 5 미 덕분에 설날이 다가와도 수원으로 올라가 음식 만들 걱정이 줄어서 좋다. 남편이 빨리 가라고 등을 떠미는 성화를 하지 않아서 더 좋고, 집을 떠나지 않으니 우선 마음부터 편안해진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당사주의 한 쪽. 구글에서 검색하다 빌린 사진.


아래 사진: 화분에서 갓 피어난 토종 동백꽃. 

섣달 그믐의 글이 우중충하여서 음력 설 전후로 피고지는 동백 꽃 사진으로 기분을 전환해본다. 동백 꽃잎 오른쪽을 자세히 보면 하얀 솜털이 보인다. 갓 핀 꽃잎 뒷면에 솜털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동백꽃을 보니 손녀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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