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혜 Apr 16. 2022

이상하고 맹랑한 OTT

해피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윤 이나 작가는 293쪽에서 '이 글을 마저 읽는 사람은 나의 중독 덕분에 넷플릭스에서 가장 훌륭한 스탠드업 코미디 쇼 추천 리스트, 그것도 개개인의 장르 인식 수준을 고려한 사려 깊은 리스트를 얻게 될 것이다. 모두 짧지만 강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나의 중독에 고마워하기를 바란다.'고 후회 없는 자신감을 나타냈다.


  진심으로 작가에게 정중히 머리 숙여서 고맙다는 예를 표한다. 덕분에 프롤로그 첫 쪽부터 외래어 검색하느라 즐거운 비명 아닌 고통을 감수하였다. 사고의 폭을 넓히고, 밀레니얼 세대 일부 작가들의 흐름 한 부분을, 외래어의 뜻, 영화와 드라마를 감상하는 법도 덤으로 알아가면서 교양을 쌓았다. 속 뜻은 작가의 말처럼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였다. 책 뒤 표지에 "인생의 다음 장 역시 기다려야 온다는 걸 그 시절, 드라마를 보며 배웠다" 일찍 인생에 눈을 뜬 젊은 작가에게 배울 점이 참 많다.  


  윤 이나 작가는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쓴다. 책 《미스 윤의 알바일지》 《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될 테니까》《라면: 물 올리러 갑니다》와 드라마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썼다. 동료와 함께 팟캐스트 <시스터후드>를 만들고 있다'고.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프롤로그부터 찬찬히 훑었다. 처음 책 표지를 보면서 따뜻한 글을 연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15쪽 작가는 프롤로그 마무리에 "어차피 요약할 수 없으므로.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야?'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을 택했다."고 밝혔다. 궁금증보다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으나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읽으면서 '어, 이나 작가의 열린 사고가 마음에 드는데…' 또 나의 감성과 맞지 않아서 지루하거나 잠이 밀려올 때는 서슴없이 자버렸다. 글 한 줄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으니까. 억지로, 어떨 땐 재미있어서 읽다 보니 윤 이나 작가가 상당히 매력 있었다. 외래어 남발하는 것만 빼면.  


  첫 글 <미세스 아메리카>를 읽으며 작가가 페미니즘{feminism: 여성주의(女性主義)는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이다. 위키백과}이라고 짐작하였다. 프롤로그 14쪽 '내가 고른 작품에는 여성, 사회적 약자, 창작자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나에게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라며 글의 방향을 밝히기도 하였으나 다 읽은 연후에야 '그 문장의 뜻이 그거 였구나'를 알아차렸다. 내가 작가의 열린 안목으로 써내려 간 책을 다 읽는 동안 '넷플릭스, 왓차, 웨이브… 외 OTT'

를 감상할 수 있는 눈높이가 높아졌다.  


  아무튼 멋지고 매력 있는 작가가 네이버 국어사전을 계속 열어보도록 하였다. 그 바람에 작가의 글에서 '다르게 표현'했으면 하는 곳도 있었고, 또 '오타'도 찾아냈다. 이 책의 '옥의 티'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적어 보려고 한다. 27쪽 하단에 "안티 페미니스트임을 자임하며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틀렸다'고 말하는 여성들,"에서 '자임(自任)'은 동사{1.임무를 자기가 스스로 맡다.(명:맡음) 2.어떤 일에 대하여 자기가 적임이라고 자부하다.(자부함)}와 명사 두 가지 뜻이 있다. '자임(自任)하며'가 아니라 '안티 페미니스트임을 자인(自認)하며'라고 해야 문맥이 통한다. '안티 페미니스트'라고 자인(自認:스스로 인정한다)하면서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틀렸다'고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오타인 듯 하다.  


  책장을 훌쩍 49쪽으로 옮기면 '원통형의 짧은 칼을 손목스냅으로 가볍게'라는 문장이 둘째 문단에 나온다. 손목이 영어로 스냅(snap)이니까 굳이 중복해서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255쪽 아래 줄에도 '그 사람이 노년의 레즈비언 여성이라는 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이다.' 여기서도 레즈비언은 여자 동성애자를 칭하는 용어다. '그 사람이 노년의 레즈비언이라는 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이다.'

라고 해도 무방하다. 샛길로 빠진 이유는 글을 읽을수록 작가가 좋아지는데, 작가는 자꾸 사전을 펼치게 하면서 엉뚱한 곳까지 긁어보게 만들었다.


  솔직히 사전을 아예 펴 놓고 글을 읽었다. 프롤로그부터 찾기 시작하여 305쪽의 16개의 글을 다 읽을 때까지 계속 사전을 열었다. 글에 몰입이 될 만하면 중단되었다. 서평을 쓰면서도 확인했다. 작가의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야?’가 아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나의 경우는 외래어가 글 읽는 것을 막았다.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은 궁금증 때문에 번거로웠어도 내가 성장하는 시간이어서 거짓말 조금 보태서 굉장히 유익한 책이었다고 고백한다.


  고백이라고 표현한 것은 몇 년 전부터 명상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멀리 하고 있다. TV는 어쩌다 시청하며 그것도 웃고 즐기는 프로그램을 한참 보고 이내 잊어버린다. 중독성이 강한 가요나 팝송을 들으면 뇌리에서 쉬 떠나지 않아 아예 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내게 윤 이나 작가의 넷플릭스와 왓챠, 웨이브 등은 작가의 말처럼 '이상하고 명랑한 OTT 안내서'는 '이상하고 맹랑한 안내서'였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는 말이다. '이상하고 맹랑한 안내서'를 생활하면서 활용하면 이해가 빠를 텐데, 나는 서평 쓰기를 마치는 순간부터 망망대해(忘忘大海)로 떠날 사람이다. 그래도 누군가 말을 하면 아는 척은 할 것 같다. 


  공감대가 컸던 글 '내가' 되기까지<비커밍 유Becoming You>. 31개월 손자와 10개월 된 손녀를 돌보고 있는 할머니로서 작가의 조카 이야기는 어떤 영화를 소개할지도 궁금했고, 읽으면서 <비커밍 유Becoming You>를 보고 싶었다.  내가 아니라 딸이 봐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172쪽 아래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수많은 처음을 경험하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 성장해가는 인간을 깊이 사랑하면서, 나 역시 내가 되어간다. 1만 4000일을 넘게 살았는데도 몰랐던 나, 새로운 내가 되어간다.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분명히 배웠을 텐데, 이건 미처 몰랐다." 나도 손주를 키우면서 내 아이 키울 때 몰랐던 점들이 눈에 들어왔고,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도 이해했다. 북망산이 더 가까운 근래에는 손주보다 나를 더 '바른 사람으로 키운다'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다. 


  끊임없이 중독된 삶, 나는 누구인가<필 굿Feel Good>. 295쪽 "조시 토머스의 <플리즈 라이크 미Please Like Me>와 마찬가지로 메이 마틴도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본을 쓴 작가이고, 같은 이름의 인물을 직접 연기한다. 하지만 이들이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은 아니다. 내 이름을 붙였고 내 이야기와 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도 나눠 가지고 있지만, 만들어진 이야기 안에 있는 한 그 안의 '나'는 나 자신일 수 없다.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이들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사는 세계를 스스로 다시 창조해 그 안에 나를 두고 밖에서 바라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알아가고 세상에 알려주고자 하는 욕망이 우선한다고 느낀다. 


  각자가 가진 소수자성을 내 이름을 한 주인공의 주요한 정체성이자 작품의 주제로 삼아, 그야말로 '특별한 작품을 세상에 내보낸 뛰어난 창작자들에게 '나'는 이야기의 기본 재료다. 1980년대 중·후반생으로 밀레니얼 세대의 한중간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작가인 동시에 배우인 점도 재미있다. 라이언 오코넬과 조시 토머스는 연출까지 했다.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세상에 내보내는 일이 가능해진 첫 세대에서 탄생한 르네상스형 창작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들이 전부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한 콘텐츠를 첫 작품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분명히 이 세대와 이들의 이야기, 창작 방식에 관해 알려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작가가 295쪽에서 "이들이 전부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한 콘텐츠를 첫 작품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분명히 이 세대와 이들의 이야기, 창작 방식에 관해 알려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이 참으로 의미심장하였다. 어떠한 글이든 잘 쓴 다른 작가의 글을 많이 읽어야 글 눈이 트인다. 작가는 여러 장에서 청맹과니나 다름 없는 나를 이끌어주기도 했다. 13쪽 '에세이는 그 세계를 사는 사람이 쓴 이야기다. 픽션은 그 세계를 사는 사람이 만든 이야기다.' 16개의 에세이는 소신껏 자기 세계를 조용히 펼쳐가는 윤 이나 작가를 대변하였고, 나는 그녀가 가슴 따뜻한 페미니스트라고 단정하였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온 하늘이 화사하였다. 하늘 가득하던 벚꽃이 버찌를 선 보이고 있다. 무상한 세월이다.


아래 사진: 아파트 단지 밖 벚나무 가로수 산책로. 3월에 시작한 서평이 4월 중순에 끝이 났다. 벚꽃 봉오리에서 수많은 꽃들이 피어서 화사한 나날인가 하였더니 어느새 초여름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생의 중력에 맞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