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배수지가 있는 야산을 넘어서 녹악매(綠顎梅) 나무 있는 곳으로 갔다. 녹악매는 배수지에서 6m 도로 건너편에 있다. 환히 다 보였다. 하얀 꽃들이 만발하여 연한 풀빛을 띄었다. 마치 나를 보고 향을 풍겨대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는 것처럼 향을 멀리, 널리 날려 보내는 사람이기를 이곳에서 발원했다. 아직 꽃이 덜 피어서 내가 한 보름 동안 녹악매의 사랑을 듬뿍 받을 것 같다. 다른 이에게도 나누어 줄 것이라는 염려는 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오직 나뿐이다. 녹악매는 여기 말고 또 있지만, 사람들이 매화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끔 나를 힐끔 쳐다볼 뿐 그냥 지나갔다. 나에게 이곳은 사진 찍기에 최적지이다. 어제 거세게 불던 바람이 심술을 얼마나 부렸는지 꽃과 봉오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꽃과 팥 알 크기만 한 흰 봉오리 하나를 주워 재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지난 달에는 여기서도 가까운 곳에 흑매가 피고 있는 나무 아래 있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코감기 탓에 막힌 코로 향을 느끼려고 무척 애썼다. 거기서 주운 봉오리를 면((綿) 가방 주머니에 넣고 밤 9시까지 잊고 있었다. 늦게 꺼내서 부랴부랴 물위에 올렸다. 바짝 말랐고 색상조차 변하여 가능성이 없었으나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잠자리 옆에 두었다. 아침에 봐도 어떤 낌새가 없었다. 버리기 아까워서 더 두고 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꽃잎이 벌어져 노란 수술도 보였다. 향기까지. "고맙습니다." "대견합니다."가 계속 나왔다. 대단한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운 녹악매 꽃과 봉오리는 아주 소중히 모시고 왔다. 나의 것이 아니라서 절대로 가지를 꺾거나 꽃을 따지 않는다.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매화가 있는 그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선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또 오면 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내일 만나자"라며 돌아섰다. 비록 아주 작은 것이지만 욕심이다. 마땅한 용기(容器)가 생각나지 않아서 숙우를 찾아서 꽃과 봉오리부터 물과 조우하도록 했다. 사막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는 사람이 물을 만난 것처럼 몇 분 후 생기가 도는 것이 보였다. 향은 말할 것도 없고. 난 봄이면 홍매, 녹악매, 흑매 또 다른 꽃이 피어서 사는 맛이 난다. 봄이 이리 나를 흥겹게 할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즐거움이다.
사위가 금요일 밤 승용차로 내 집에 모셔다 주었다. 내가 버스 타고 오가며 손자에게 감염시킬까 봐 딸이 사전조치를 하는 거였다. 못 이기는 척 타고 오가면서 사위와 대화를 나눈다. 내 딸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사위를 두둔해준다. 딸에게 잘해줘서 고맙다, 손자에게도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는 연습을 평소에 해라. '말은 훈련'이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사위를 대하는 원칙 중 첫 번째는 무조건 '사위가 잘한다', 나는 '너의 편이다' 내 딸을 기선 제압하라고 부추긴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주말은 딸의 통제가 없는 시간이다. 나는 산책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말없이 다닌다. 혼자 꽃에 취해서 놀다 보면 코로나는 아주 먼 나라의 안개 같은 것이다. 안개는 햇살에 걷히는 법. 조용히 안갯속을 거닐며 육신 건강을 챙기고, 정신건강도 돌보면 만사여의 형통이다. 그러니 딸아, 제발 말(言)에 묶이지 마라. 지나가는 바람도 현명하게 대처하면 피하든지 비껴갈 수 있다. 사실 딸에게 이 말은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 살짝 다녀와서 입 다물면 그뿐이다.
딸에게 월요일 한의원 들려서 간다고 했다. 버스 타고 가겠다고 하여도 모시러 온다며 우겼다. 그럼 또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줘야지. 버스를 탄다면 녹악매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흠향하며 그곳의 꽃이 피고 지는 상황을 점검할 수 있다. 내가 매화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걷는 동안 어느 지점에는 백매가, 얼마만큼 더 가면 꽃사과 꽃 등이 피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딸 내외는 나의 망중한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때. 이미 손자가 태어나기 전에 충분히 즐겼고 행복해 했으니까. 이젠 형편 닿는 대로 물결처럼 흘러가는 내가 되었다. 봄날이 가는데 나도 따라가야지...
봄날은 잘 가고 있다.
사진: 정 혜
녹악매: 꽃받침이 연한 녹색이다. 푸를 녹(綠), 꽃받침 악(萼), 매실나무 매(梅)를 써서 녹악매(綠萼梅)다. 매실 나무에 피는 꽃이 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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