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by 정 혜

'그리스인 조르바', 많은 사람들이 이 책명을 거론했다. 무척 궁금했고 읽고 싶었지만 근래에 인연이 닿았다. 추천의 말씀도 있고 하여 기대를 하면서 책을 펼쳤다. 읽기 전의 나는, 글의 표현을 중점적으로 살필 것과 번역이 잘 되었다고 하여서 문장들을 눈여겨보려고 했다. 처음 몇 장은 지루하여 책의 약 표제 지를 다시 읽고, 맨 마지막 판권 지를 찾았다. 판권지 대신 '20세기의 오디세우스'부터 자세히 읽게 되었다. 오히려 본문보다 접근이 쉬웠다. 그래서 첫 장부터 줄 긋고, 옆에다 생각나는 점을 적고, 의심쩍은 표현이나 단어를 다음이나 네이버 사전을 참조하면서 진도가 나갔다.


'일정한 도덕률의 틀 속에서 온전하게 제 몫의 삶 누리기를 마다하고 떠돌이 앞소리꾼이 되어 영혼의 자유를 외치는 거인, ~ 신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대략 내용이 짐작되는 첫 문장이었다. 작가가 살던 시대는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가 쉬운 때와 장소가 아니었다. 선구자적 삶을 살았다고 사려되었다. 그리고 예지력이 탁월하게 우수하였다는 점.


446쪽에 '크레타는 신들을 길러 낸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 욕심 많고, 거짓말 잘하고, 난폭하고 거칠기로 소문난 크레타인들의 섬이다. 크레타는, 평화 시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광란의 불길에 쫓기게 하는 섬, 지극히 세속적인 방법으로 삶을 사랑하고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땅이다.' 이 문장에서 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통 사람들이 느끼면서 행동하고 사는 모습은 같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생김새가 다를 뿐 인간의 욕심으로 빚어지는 행위들은 같다는 것을.

번역 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장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84쪽 셋째 줄 '마침 불까는 사람이 돼지 불알을 까러 오늘 마을로 들어옵니다.'에서 수컷의 불알을 까는 사람을 '불까'라고 부르는 건지, '불까'라는 사람이 온다는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96쪽 아래, '환상은 살같이 지나가며 사라지려 했다. 나는 그 환상을 따라잡아야 했다.' ①환상(幻想)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②(幻像)은 [같은 말] 환영 1(幻影)(2. 사상(寫像)이나 감각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보이는 환각 현상). 이라고 네이버 사전을 정의하고 있다. 나는 허상(虛像)을 찾아봤다. '실제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 환상보다 허상이 더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하며, 번역자도 한자를 대조하면서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 더 244쪽 일곱째 줄 '~비탄(悲嘆)으로 차올랐다.' 다시 사전을 보니 그 뜻이 '몹시 슬퍼하면서 탄식함'. 그럼 '~미완성 항아리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몹시 슬퍼지면서 탄식으로 차올랐다.'라는 문장이 된다. 탄식은 '한탄하여 한숨을 쉼. 또는 그 한숨'이다. 탄식으로 '차올랐다'라는 표현이 걸려서 사전을 뒤적이게 만들기도 했다. 여러 군데서 옥에 티가 눈에 띄어서 내가 글 쓰는 보람을 느꼈다.


십계명이라는 용어가 종종 나온다. 458쪽에는 조르바가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나는 책에서 조르바가 매력적인 인물로 보면서도 이 대목은 '남자는 그래도 된다'라는 식의 가부장적인 면모가 대두되었다. 책을 읽으며 실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숲을 본 것이 아니라 숲속의 한 나무만 본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동서양에서 기독교의 십계명이나 불교의 오계를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그래도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라는 대답이 나왔을까.


십계명은 1~5번까지는 하나님만 유일신으로 섬기고, 욕되게 하지 말고 등 신과 관련되어 있다. 6부터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이웃집을 탐내지 말라' 천주교와 개신교가 약간 해석적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다. 예나 지금이나 실천하지 않는 데는 올바르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거나, 시켰지만 한 쪽 귀로 듣고 다 흘러 나갔다는 뜻이 된다. 기독교는 잘 모르니 거두하고, 불교는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악업을 쌓아서 본인이 좋지 않은 습관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지향하지 못한다는 가르침이다. 내 삶은 차치하고 자식이 배워서 부모의 인생을 답습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이 점이 무서워서 실천하며 산다.


지난 토론 시간이 참으로 소중했다. 공심님의 해설과 여러 토론자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다양하게 사유할 계기가 되어 우물 안 개구리는 하루바삐 나왔어야 했다는 것. 작가의 주변 상황이나 장면 묘사는 시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줄을 계속 그었다. 그리스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고, 오스만 제국, 기독교 사상 등 무식은 하루바삐 출장 보내고 유식으로 보초를 세워야 아는 소리도 좀 할 것인데… 머릿속만 바쁘다, 바빠.


작가는 아쉽게도 대승불교 사상에 심취되어 있었다. "메토이소노(聖化)는 포도가 포도 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 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이어서 아래 문장은 "보라, 조르바는 사업체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노이소노'다. '거룩하게 만들기'이다. 나는 조르바라고 하는 위대한 자유인을 겨우 책 한 권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다"


내가 '아쉽게도 대승불교'라고 위의 문단에서 적었다. 대승불교는 석가모니 붓다 대열반 이후 붓다의 무덤 주위에서 기존의 변질된 불교의 틀을 벗어나고자 재가자들이 단초가 되어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석가모니 붓다 대열반 후 붓다의 말씀은 하나도 빼지 말고 그대로 실천하며 따르자는 '테라와다'와 시대가 변했으니 약간 바꾸자는 '진보파'로 나누어진다. 진보파는 계속 부파(部派) 하였고, 부파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파가 '우리가 붓다의 정통 제자다'라고 부르짖으며 대승(大乘, 마하야나)이라고 자칭했다. 그러면서 다른 부파들은 소승(小乘, 히나야나)라고 폄하하였다. 그리고 법화경, 화엄경, 반야경, 아미타경 등을 만들었다. 경(經)은 붓다의 말씀이며 중국에서 한역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테라와다는 그대로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소위 남방불교라 칭해지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테라와다불교 또는 팔리(빨리)불교, 상좌불교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 국가이고 붓다 재세 시 가르침은 현재 많이 왜곡되었고, 왜곡된 가르침이 전부인 양 알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작가도 대승불교에 매료되어 있어서 아쉽다고 표현했다.


말이 길어졌다. 붓다는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가르치고 전한 법과 율을 너희의 스승으로 삼도록 하라"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대열반 후 제1차 불교 결집대회를 통해 이 말씀은 세 가지 원칙으로 강조되어 지켜졌다. 그 '하나가 붓다가 정하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마라. 둘째 이미 정한 원칙을 없애지 말라. 셋째 붓다께서 설하신 계와 율에 따라 수행하라'라고 정했다.


메토이소노는 붓다가 설하신 말씀이 아니다. 경전 그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고(苦)와 고멸(苦滅)을 강조했다. 그 뜻은 지금 내가 괴롭게 사는 원인은 사고(四苦). '생로병사' 즉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 없고, 나이 들어 늙고 싶은 사람 없으며, 또한 아프고 싶은 사람 없을 뿐만 아니라, 죽고 싶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견뎌내기 힘든 고통으로 표현했다. 다음 구부득고(1. 생로병사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 2.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세상만사가 뜻대로 이루어졌는지), 애별리고(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원증회고(죽도록 미운 사람이나 원수를 만나야 하는 고통), 오음성고(안이비설신 이 다섯 가지의 감각기능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고통)에 웬만한 사람들은 휩싸여 산다. 붓다는 우리들에게 괴로움에 끄달려서 살지 말고, 재가자는 오계 잘 지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고멸) 지름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너도 나도 실천은 잘 하지 않는다. 체험해 보면 체득이 된다. 그러면 실천이 계속된다. 그리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우선순위라고 밝혔다. 그럼 십계명이고 오계를 실천해야 한다.


결론은 조르바가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한 과보를 성화시킨다고? 물론 과거의 치부는 그 당시 최선인 줄 알고 행동 했기에 긍정적으로 전환하면 되고, 모두가 그렇게 살았으니 퉁 치자. 그렇더라도 악업은 지워지는 것일까. 기억에서 사라질까. 그 과보는 조르바가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유럽에서 배척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승불교 전승 시대에 살았으니 작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므로 아쉽다는 것이다.


작가의 표현법은 글 쓰는 초보자로서는 굉장히 신선했다. 그런데 나는 팩트풀니스가 왜 자꾸 생각나고 그리워지는지. 노벨문학상이 눈이 멀어 작가에게서 비켜 갔지만, 나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같은 담백한 글이 내내 먹고 싶었다. 자질구레한 고뇌, 번민 이런 용어에 휩싸이지 않고 그저 파란 하늘이 되었다면 작가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라고 묘비명에 적었을까. 문득 언제 적 EBS에서 그리스 기행 편이 나왔는데 그 인물이 작가였다. 무식이 보초를 서던 때라 감히 작가를 알아 뵙지 못했다.


마지막 인상 깊었던 대목은 철탑이 무너지는 장면 묘사, 담대하게 허허로운 작가. 나는 작가가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는 하나의 상징처럼 읽었다. 인부들이, 구경꾼들이, 신부가 무너지는 철탑과 자재들을 피해 달아나는 묘사는 웃음이 마구 터졌다. 그리고 오르탕스 부인의 임종 장면 묘사에서 이웃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들, 결국 그들도 십계명을 앵무새처럼 되뇌기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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