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니 언제 갈 낀데 4

"아, 글쎄 내 얘기 들어보라니까"

by 정 혜

4월 중순, 동해시 도계면에서 잠시 살고 있는 지인이 놀러 오라고 바람을 넣었다. 몇 이서 5월 25일 기차표를 예매해두고 출발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 이태원에서 '거시기'라는 것이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여 한반도가 시끌벅적. 손자를 돌보는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정보였다. 날이 임박해지자 딸은 가지 말라고 눈을 흘기고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내가 유방암 수술 후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퇴임 공직자가 일주일 전에 못 간다고 손을 들었다. 나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날자는 어김없이 코 앞에 당도.


아침 6시 무궁화 기차를 세 여자가 탔다. 셋 중 막내가 기차표를 예매하여, 나는 목적지까지 몇 시간이 걸리는지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동해역까지 무려 5시간, 대구 도착은 밤 10시 58분이었다. 딸이 걱정되어 나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였다. 나는 대문을 닫는 순간 집 생각은 없어진다. 오직 나의 순간에 충실한 사람이다. 오늘은 좀 달랐다. 옆의 지인들도 웃으며 나를 지켜봤다. 궁리 끝에 기차가 오전, 오후에 한 대씩 뿐이라서 밤늦게 아파트에 당도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면서 내 딸을 걱정하는 문구도 적었다. 이내 답이 없었고, 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라 편하게 동해로 가고 있었다.


나, 칠십 대 언니, 이제 막 오십 인 막내는 성향이 각각이었다. 도계역에서 칠십 대 둘째 언니가 합류했다. 필명을 '배니'로 쓰는 이 언니는 앉자마자 말이 일방적으로 마구 쏟아져 나왔다. 이내 등에 짊어진 가방을 내리더니 전기밥솥에서 바로 꺼내온 카스텔라를 꺼냈다. 뜨뜻한 빵을 먹으라고 쪽을 나누어서 막무가내로 권했다. 아침 삼아 김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권유를 물리칠 수 없어 셋은 또 먹었다. 건강빵을 만드는 방법과 그동안 도계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 주우~ㄹ 줄 흘러나왔다.


둘째 언니 남편은 전기기술자다. 좋은 기술은 퇴직을 했었도 계속 일이 이어져서 기쁘다고 했다. 함께 온 지인들은 수필을 배울 때 만났다. 나는 등단하여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둘째 언니는 후세에게 글을 남기고자 쓰는 등단하지 않은 작가다. 대구에서 같이 출발한 두 사람은 글에 관심이 없다. 둘째 언니를 뺀 세 사람은 대화가 주거니 받거니. 개인사를 들어주다가, 장단도 맞추면서 서로 소통했다. 도계에서부터는 상황이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아, 글쎄 내 얘기 들어보라니까" 막내가 반론을 제기했다가 이내 입이 닫히고 말았다. 그녀의 말들은 경험에서 우러난 소중한 소식이지만 혼자서 장구치고 북 치고 장내 정리까지 다 해버렸다.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지난날이 있었다. 수필을 배울 때 가끔 모여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면, 자기가 분위기를 완전히 주도하여 이끌어야 하는 타입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후 나는 조용히 있기로 작정했는데, 기차 속에서도 무릎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들은 '꼼짝 말아'였다.


나의 따님께서 장문의 카톡을 보내셨다. "아 엄마 지금 코로나 다시 난리 났는데, 왜 진작에 말 안 하고." 이어서 "다들 미쳤나 뉴스도 안 본대? 가기로 했다가도 지금은 멈춰야 되는데" 약이 바짝 올랐다. 또 "마스크, 천 마스크 꼈지? 어디 약국이라도 가서 kf94 마스크 끼고 다니세요. 혼자 안전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 안전도 중요하니까. 마스크 단디 끼고, 안전하게 다니고. 손 꼭 비누로 오래 씻고" 그러면서 "손소독제 없으면 것도 사서 바르고 다니세요." 다시 '카톡' 열어보니 "내가 별나게 굴어도 안전한 게 최고야. 우리 가족 안 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방비하게 다녀서 균 옮기고 나만 무증상으로 넘어가면 사회에 민폐야. 이 사태가 끝나지 않고 계속 고생해야 되잖아" 나는 손전화기를 일단 꺼버렸다. 딸을 무시하는 것 같아 열어서 일행에게 내비쳤다. 내 딸이 코로나로 흥분했다고. 마지막으로 "식당 가면 무조건 나눔 접시랑 나눔 수저 사용해서 덜어 먹어야 하고"


나는 손자를 위해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고, KF94 마스크로 바꾸었다. 둘째 언니는 점심 식당을 어제 바깥 분과 사전 시찰하면서 봐 둔 곳으로 안내했다. 하나도 틀리거나 잘못된 상식을 말하지 않았다. 맞는 말씀만 했다. 단지 들으라고만 하여서 문제였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목표를 정하면, 주위의 친한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행동하는 추진력 있는 리더다'라고 판단했다. 가는 곳마다 영리하게 주머니를 열어서 베풀 줄도 알고, 이웃을 수하로 다룰 줄 알았다. 일방적이긴 해도 그녀에게서는 내가 배울 점뿐이었다.


대구 가는 기차가 한 시간이 더 남았다. 둘째 언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동해역으로 가보자고 제의했다. 발품을 팔아야 여행의 맛이 나고, 그래야 자신감이 든단다. 우리 셋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도계역에서 만났다는 승무원 아가씨와 오랜만에 손녀를 보는 것처럼 정답게 대화하는 모습이 차창으로 비쳤다. 대단한 친화력이다. 하긴 나도 한 살씩 많아지면서 늘어나는 것은 '넉살과 뻔뻔스러움'이었다. 셋은 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따라다녔다는 인상은 감출 수 없었다.


딸은 내게 자가격리를 명령했다. 처음엔 딸이 심하다 싶었는데, 다섯 시간이 무료하여 다음을 검색하니 '어린이 괴질'이 어떻고 저떻고… 겁이 덜컥 났다. '그래, 이때까지도 휩쓸려서 다녔는데 한 번 더 회오리에 말린 들 그것이 뭐 그리 대수냐'





https://blog.naver.com/jsp081454/221979527955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공존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