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사랑해도 괜찮아 & 리틀 포레스트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자연인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지만, 몸은 힘들어도 정신적으로는 훨씬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주위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내 체력조건이 너무 형편없다는 것이다.
하긴 몸 쓰는 것은 잼병이다. 운동에 소질이 있는 한 친구는 내 뒷모습만 보고도 첫눈에 운동신경이 영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코로나가 시작되던 즈음, 쿠팡 물류센터나 배달 알바가 부업으로 떠오를 때 한번 해볼까 하고 말했더니 또 한 친구는 돌직구를 날렸다.
“너는 걷는 것만 봐도 탈락이야.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그렇구나... 나란 인간...
눈에 띄는 몸치이다 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육체적 노동, 운동, 심지어 춤에 이르기까지 몸만 조금 움직이면 수많은 디스를 당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쓰는 생활에 대한 로망은 점점 더 커져 버렸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은 시골살이다.
나에게 시골살이 로망을 처음으로 일깨워준 것은 일본 만화 <백성 귀족>이었다. 홋카이도의 시골에서 우유 목장을 하는 집안의 딸이 농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농장일을 도우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준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게으른 내가 가장 찔렸던 부분이다...)
부모를 도와 일하는 어린이들은 자연스럽게 농기구 쓰는 법을 익히고 면허는 없지만 웬만한 차는 다 운전할 수 있게 된다. 몸 좀 다치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 게다가 소고기에 유제품에 야채까지, 직접 재배하고 만들어 먹는 음식의 재료는 최고 수준이다. 저자는 일본 최대의 도시 도쿄에 와서는 사람들이 먹는 맛없는 음식에 경악한다.
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시골살이의 꿈은 두 개의 영화를 보고는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 시골살이 영화 <사랑해도 괜찮아>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도 상관없을 것 같은 영화이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딱히 스토리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프랑스 시골의 멋진 풍경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삼십 대 중반에 남편과 사별하고 남편이 농사짓던 땅을 일구며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고단한 싱글맘 루이즈는 농사 성적은 형편없고 은행 대출은 늘어만 가는데, 그나마 믿었던 대출 연장도 되지 않아 결국 농지를 팔기로 한다.
이런 와중에 아스파거 증후군이 있는 피에르가 나타난다. 그는 대인관계가 서툴러 남들과 확실히 다른 구석이 있지만 컴퓨터, 수학, 기억력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루이즈에게 한눈에 반한 피에르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피에르의 도움으로 루이즈는 농토를 지키고 농장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농사는 고된 직업이지만 화면으로 보이는 시골 풍경은 예술이다. 노란 해바라기, 보라색 라벤더, 하얀 배꽃이 핀 과수원, 하늘이 말갛게 비치는 투명한 계곡물, 미세먼지 따위는 이름도 못 내밀 청정한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무대로 아메바처럼 계속 변하는 하얀 구름.
게다가 트랙터를 능수능란하게 운전하고 과수원을 가꾸고 심지어 틈틈이 빵과 과자를 구워 노천시장에서 판매하는 루이즈는 영화 스토리 상으로는 능력 없는 농사꾼이지만 나에게는 걸크러쉬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육체적 노동을 척척 해낸단 말인가?
영화는 푸른 오후의 하늘이 석양으로 변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끝을 맺는다. 아... 저렇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해가 긴 여름날에는 천천히 하늘도 올려다보며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그 순간을 즐기면서 말이다. 시골에서의 시간은 확실히 도시와는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리틀 포레스트>는 극적인 부분이 전혀 없는 스토리와 사계절을 담은 영상이 주는 한가함과 쉼의 느낌이 좋다. 이 영화는 어느 장면부터 보든 별 상관이 없다. 우연히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이미 몇 번이나 본 참이라 딱히 볼 생각이 없었는데도 어느새 영화에 빠져 있다. 혼자 시골에서 살기 위해서는 해야 할 노동의 양이 어마어마하지만 화면상으로는 그저 모든 풍경이 예쁘고 노동은 서툴게 천천히 해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취업도 연애도 잘 되질 않아 고향집으로 돌아온 혜원은 고향 친구 재하와 은숙과 함께 직접 키운 농작물로 제철음식을 해 먹으면서 사계절을 지낸다. 자신의 인생을 찾아 집을 나간 엄마가 어린 시절 해줬던 음식도 만들어 본다. 엄마의 음식은 시골의 투박함보다는 도시의 세련됨이 녹아 있다. 깡 시골에서 그런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 좀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시골집은 도시의 공동주택과는 다르다. 고장이 나면 아파트 관리실에 문의하거나 수리기사를 부르는 일 따위는 할 수 없다. 뭐든지 내가 해야 한다. 계절이 바뀌면 그 계절에 맞는 채비를 해줘야 한다. 집이든 땅이든 말이다. 시골집 처마 밑에 달려 말라가는 감은 곶감으로 완성되면 맛있지만 그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사람 품이 든다. 거리 소음은 물론 바람 한줄기 들어오지 못하는, 아파트에 흔한 이중창도 없다. 오래된 나무틀의 창문 틈 사이로는 바깥의 매서운 바람이 들어오고 한 겨울에는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도 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얗게 쌓인 눈과 봄의 따뜻한 햇살에 답하듯 톡 튀어나오는 새싹과 온통 푸르게 커버린 벼와 울창한 산과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과 밤나무를 보면 시골로 가고 싶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장맛비가 우렁차게 내리는 소리, 늦가을의 을씨년스러운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낙엽 밟는 소리, 눈길을 걸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를 들으면 한 번쯤은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다.
한 번도 도시를 떠나 살아보지 않은, 뼛속까지 도시 사람인 내가 과연 시골살이를 할 수 있을까? 그냥 용기를 낸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 로망을 마음속에만 간직한 채 끝내고 싶지는 않다. 무언가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베란다에서 샐러드 야채 키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년 봄이 오면 블루베리와 차나무 화분을 들여서 키워 볼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에게 시골살이란 몸을 쓴다는 것과 동급이다. 인간으로 사는 인생은 한 번으로 족하지만, 혹시라도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면 몸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농사를 짓든 깊은 산속 암자에서 홀로 사는 중이 되든 말이다.
+커버 이미지: <사랑해도 괜찮아>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