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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Jan 07. 2022

가장 길었던 덕질. 사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

feat. <무간도> & <나의 소녀시대>


몇 년 전 드라마 <도깨비>가 추운 겨울을 뜨겁게 달구던 그 해, 이 드라마의 작가는 어린 시절의 팬심을 살려 등장인물의 이름을 ‘유덕화’라고 지었다. 


‘헐… 뭐야… 아직도 유덕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네.. 사실, 나도 그렇거든’ :)


살짝 어이없으면서도 미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홍콩 누아르가 영화계를 평정하다시피 했던 나의 소녀시절에 유덕화의 존재감은 엄청났지만 이상하게도 내 주위에는 같이 덕질을 할 친구가 없었다. 각자 자신의 우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실운동장에서 유덕화의 콘서트가 열렸다. 다행히 같은 반에 유덕화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오직 한 가지 공통 관심사 ‘유덕화’로 인해 우리는 같이 콘서트에 갔다. 아침 일찍 도착해 줄을 서서 내내 기다렸다. 심지어 화장실을 가거나 무엇을 먹은 기억도 없다. 무대 바로 앞에 앉을 수 있다는 말이 들렸고 웅성거리는 무리를 따라가서 정말 좋은 자리를 맡았다. 딱 여기까지 기억 속에 남아있다. 


정작 중요한 이벤트인 콘서트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의 기절한 수준이었을까? 유덕화가 무슨 옷을 입고 어떻게 등장해 무슨 노래를 부르며 어떤 몸짓을 했는지 말이다. 그리고는 홍콩영화가 쇠퇴해 가면서 유덕화 덕질도 자연스럽게 중단했다. 





2000년대 중반 초여름 마카오. 

번화가에서 우연히 시계 광고에 나온 유덕화를 보았다. 길 중앙에 한참 서서 거리에 가득 찬 광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아이를 우연히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후 여기저기서 유덕화를 우연히 보면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덕질을 이어갔다. 





나온 지 한참 지나 보게 된 <무간도>는 이제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꼭 한 번씩 보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홍콩영화의 비장미가 그대로 살아있는 이 영화는 인생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은 이해하기 힘든 일도 수없이 많고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해도 그저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주인공인 유덕화와 양조위의 연기에 결점이라곤 없다. 2002년 영화 속 유덕화는 언제 봐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스토리 자체가 탄탄해서 볼 때마다 감탄한다. 매번 내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각인된다. 경찰과 조직폭력배의 이야기라서 폭력이 난무하지만 향수를 건드리는 서정적인 분위기도 만만치 않다. 





2017년 봄 홍콩. 

새로 생긴 미술관인 M+ 파빌리온에서 홍콩 대중문화에 관한 전시를 열었다. 전시장으로 가는 길은 80년대와 90년대의 영화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전시장에는 그 시절의 오빠들인 유덕화, 장국영, 주윤발이 다 있었다. 


홍콩 M+ 파빌리온 가는 길에 설치된 전시 포스터 


나를 놀라게 한 뜻밖의 전시품은 유덕화가 20대 초였던 1984년의 잡지 화보였다. 1980년대 후반 한참 유행했던 일본 잡지 논노(non-no)풍의 사진이었다. 멋진 척하며 큰 나무에 살짝 기댄 포즈~ 유덕화의 풋풋한 청춘시절을 보고 있으니 마치 잘 키운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가 지을 듯한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나는 내 소녀시절과 마주했다. 화려한 홍콩은 아니었는데, 폭력과 뒷골목 일상에 찌든 그런 인생이 가득한 홍콩이었는데, 이상하게 따뜻하고 가슴 뛰었던 영상과 이야기에 탐닉했던 그 시절 말이다. 





2016년에 개봉한 대만영화 <나의 소대시대>의 감독 프랭키 첸도 유덕화의 찐팬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야 굳이 주인공을 ‘유덕화 마누라’가 소원인 고등학생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별 특색 없는 평범하고 착한 여학생과 문제아로 반항기가 다분한 남학생의 알콩달콩한 첫사랑 얘기다. 유치하지만 귀엽다. 오글거리지만 두근거리기도 한다. 남의 학창 시절인데 마치 내 추억인 마냥 그립다. 게다가 시대적 배경이 1994년이니 요즘 고등학생들보다는 좀 순진한 구석이 있다.


세월이 휙 흘러 유덕화 열혈 팬이었던 여주인공은 회사원이 되어 쳇바퀴같이 반복되는 힘든 일상에 허탈감을 느낀다.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유덕화 콘서트에 가려고 하지만 표는 이미 매진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콘서트가 열리는 공원으로 향한다.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사는데 마침 유덕화가 커피를 사러 오는 게 아닌가!!! 기회다 기회!!! 사인을 받고 같이 사진을 찍는다. 유덕화는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콘서트를 보러 오라고 한다. 그녀에게 표를 건네주러 온 콘서트 관계자는 바로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 유덕화를 덕질하던 내 소녀시절의 기분이 오롯이 되살아 난다. 화보집을 사고 잡지를 사고 노래 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중국어 발음을 따라 적으며 노래를 외우고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콘서트를 보려고 아침부터 가서 기다리던 시절 말이다. 





2018년 가을 대만. 

타이베이 101 타워 쇼핑몰에서 유덕화의 시계 광고를 보았다. 역시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멋지게 나이 들었다. ^-^


지하철을 타고 위안산역의 엑스포공원으로 향했다. 서울로 치면 올림픽 공원처럼 넓은 곳인데 <나의 소녀시대>의 주인공이 유덕화의 콘서트를 보러 와서 우연히 유덕화를 만난 공원과 비슷해 보였다. 혹시 나도 유덕화를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실현 가능성 0%의 사건을 기대하며 공원을 둘러보았다. 공원에는 마실 나온 동네 주민들이 잔뜩 있었다.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 온 젊은 부부, 벤치에서 신문을 읽는 할머니, 큰 개를 데리고 와서 훈련시키는 아저씨 등… ’그냥 한가로운 동네 공원 같네’ 하며 옆을 보니 상의를 탈의한 채 차력 연습을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이국적이고 특이한 광경에 유덕화 망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코로나가 끝나면 여기저기 중화권 도시를 다니면서 또다시 광고로 유덕화를 만날 수 있겠지. 길거리에서 쇼핑몰에서 유덕화의 광고를 발견하면 가던 길을 잠시 멈춰 서서 쳐다보고는 씩 웃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몇십 년이 흘러도 그때 그 시절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덕질의 힘이다. 





PS.

- ‘팬심’으로 검색하니…헐… 대애박!! 

팬심을 자랑하는 <주접이 풍년>이란 프로그램이 곧 방영된다고 한다. (관계자 절대 아님)


- 예전에 유덕화 팬이셨던 분들 댓글로 인증해주시면 안 될까요?^^ 눈치 보지 말고 신나게 떠들어 봅시다~





+커버 이미지: <무간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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