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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Dec 27. 2021

중년 여성의 재기는 허황된 꿈일까?

feat. <블루 재스민> & <원더 휠>


가끔 어떤 영화는 현실보다 더 냉혹하고 잔인하다.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날리려고 작정한 것일까? 


특히나 세상이 유독 나에게만 잔인하다고 느껴질 때, 그런 영화를 보면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든다. 내 인생보다 더욱 가혹한 남의 이야기는 위로가 되는 동시에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한 암시가 되어 우울감을 가중시킨다. 지독히도 안 풀리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지금 겪는 일이 인생의 바닥이 아니라 그 밑으로도 내려갈 수도 있다는 소름 끼치는 현실의 가능성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시의 불빛은 반짝이고 낮의 풍경은 아름답고 주변 타인들은 다 행복해 보이고 어떻게든 다들 살아가는 재주가 있어서 일상이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 같은데 내 인생에만 구원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기약 따위는 없다. 탈출구 없는 지지부진한 현실에서 재기를 꿈꾸지만 결국은 좌절한다. 도대체 언제쯤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을까? <블루 재스민>과 <원더 휠>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이다.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을 만나보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업가와 결혼해 뉴욕의 상류생활을 향유하며 살아왔다. 화려한 파티, 고급스러운 취향, 명품 쇼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돈이 그녀가 진정 즐기던 것이었다.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났다는 것이 주변에 소문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질투심과 창피함에 남편의 불법행위를 FBI에 신고하고 결혼 생활은 파탄이 났다. 


재스민은 결국 뉴욕의 반대편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의 집으로 향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명품밖에 없는지라 샤넬 트위드 재킷에 에르메스 핸드백을 들고 루이뷔통 캐리어에 짐을 싸서 나타난다. 명품으로 휘감은 그녀가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살며 개인병원의 접수원으로 일하는 상황은 극적으로 대비되며 그녀의 몰락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재스민은 재기를 노린다. 자신을 한껏 포장해 외교관을 유혹한다. 그러나 중년의 남자는 만만치 않다. 그녀만큼 노련하다. 결국 재스민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실크 블라우스 밖으로 베어 나온 겨드랑이의 땀이 재스민의 현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현실을 곧 죽어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원더 휠>에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전직 배우이자 현재 웨이트리스로 살아가는 중년 여성 지니가 나온다. 사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행복했다. 배우로 일하다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의 외도로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배우로서의 경력은 지지부진했고 안정된 삶을 위해 재혼하지만 실상은 힘들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이다. 지니와 남편은 코니 아일랜드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이어간다. 


그러다 지니는 해변의 안전요원인 대학생 미키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마키에게 점점 집착하고 둘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종용한다. 하지만 미키는 결국 지니의 의붓딸을 좋아하게 된다. 인생은 이렇게 희극과 비극이 교차한다. 지니의 삶은 다시 지지부진한 현실로 돌아온다. 낚시와 친구들을 좋아하는 주정뱅이 남편과 불장난을 일삼는 아들 사이에서 끝없는 줄다리기를 계속해야 하는 그 지겨운 삶 속으로 말이다. 




우리는 두 주인공의 삶에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재기의 기회가 거의 남아있지 않거나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영영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가능성은 나이에 반비례하니까 말이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우리 인생에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 젊음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 순간을 살고 있을 때는 전혀 깨닫지 못한다. 재스민과 지니도 인생의 구비구비마다 젊음이 선사한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씩 골라가며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마주하고 싶지 않은 구질구질한 현재에 당도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도 힘이 부친 중년의 여성이 전도유망하고 객관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남자를 만나 인생역전을 꾀하는 것은 이제 영화에서도 불가능하다. 더 이상 스크린에는 영화 같은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년 여성이 좋은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바람은 최고로 허황된 꿈이라는 것을 잔인한 에피소드의 묶음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니 정신 차리라고, 재스민의 땀에 젖은 실크 블라우스나 지니의 웨이트리스 유니폼이 현실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현실적인 중년 여성의 재기는 신데렐라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재스민도 지니도 남자를 통해 편안한 삶을 얻겠다는 목표는 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며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던 재스민은 굳게 결심하고 그 길을 가보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젊은 시절 남자와 사랑에 인생을 모든 것을 걸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처음으로 시작하는 자신의 커리어에 모든 것을 걸어봐야 할 수도 있다. 기대에 차지 않는 남편과 말썽꾸러기 아들과 같이 해야 하는 삶은 불만 투성이겠지만 지니는 과거에 본인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 인생의 짐을 어떻게든 짊어지고 가겠다는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망상에서 벗어나 두 다리를 땅에 굳건히 붙이고 걸어 다닐 시간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내 주변과 경험과 삶에서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야속해도 현실은 냉정하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나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이기, 그리고 그 위에서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기, 이런 연습이 필요하겠지. 아무리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외쳐댄들 이 사회는 그리고 현실은 나이에 맞는 본분과 역할이 무엇인지 기가 막히게 알려준다.  




+ 커버 이미지: <블루 재스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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