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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Jan 27. 2022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feat. <잔칫날> & <굿바이>


지금까지 수많은 장례식에 참석했다. 젊었을 때는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예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이 많았다. 친구의 할아버지나 할머니, 회사 상사의 아버지나 어머니 등등.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친척의 장례식이 부쩍 늘어났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큰아버지, 큰어머니, 외숙모, 심지어 나보다 나이 어린 사촌까지. 돌이켜보니 꽤 많은 죽음이 있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인생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대하는 것은 아닌지. 분명 죽음의 그날은 언젠가는 오는데,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거나 얘기하는 적은 별로 없다. 바로 코앞에 닥칠 때까지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한다고 할까. 죽음이 삶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어색한 일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죽음의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 어쩌면 갑자기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인정하기 싫지만 하루아침에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그 일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가 많고 장례식까지의 절차는 꽤나 복잡하기에 막상 상을 당하면 정신줄을 꼭 잡고 그 일을 해내야만 한다. 죽은 이를 진심으로 기리고 이별하기 위한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은 장례식이라는 절차가 끝난 후에 일부러 시간을 내야 가질 수 있는 사치이다. 


바쁜 현실에서는 장례식은 그저 절차와 형식에 맞춰 정해진 시간 내에 완료해야 하는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헷갈린다. 과연 장례식은 누구를 위한 의식일까? 고인일까? 상주일까? 장례식장을 찾은 손님들일까? 






한국 영화 <잔칫날>은 장례식을 둘러싼 애매하고 불편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1년 넘게 병원신세를 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대학생인 딸은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전공 공부에 필요한 학원에 다니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아들은 이벤트 회사를 통해 일을 받아서 전국 곳곳으로 행사를 다니며 근근이 살고 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모든 일에 돈이 필요하다는 현실이 무섭게 다가온다. 당장 밀린 병원비와 장례식비를 마련해야 한다. 문제는 현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여동생에게 맡기고는 슬그머니 일을 하러 간다. 


아들은 어느 시골에서 열린 팔순잔치에 가서 사람들을 웃기며 사회를 본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팔순잔치의 주인공인 할머니도 잔치를 즐긴다. 그런데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고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주인공은 아버지 장례를 위해 돈을 벌러 온 시골에서 또다시 죽음과 대면한다. 


엄청 꼬여버린 상황 때문에 주인공은 행사비를 바로 받지도 못한다. 돈이 없이는 아버지 장례식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무작정 기다린 끝에 사건이 일단락되어 수금을 하고 드디어 아버지 장례식장으로 가게 된다.


밤늦게 돌아온 오빠를 보고 여동생은 눈물이 복받친다. 왕래도 없던 친척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만행 수준의 성화를 부려서 마음을 다치고, 차라리 안 오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오빠 친구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지치고, 뒤늦게 오빠가 장례비를 벌러 행사를 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미안함에 눈물은 그치지 않는다. 






일본 영화 <굿바이>에서는 오케스트라가 해체되어 직업이 없어진 첼리스트 다이고가 고향으로 내려가 생계를 위해 납관사가 된다. 일본의 납관사는 시체의 염습과 입관까지 진행하는 직업이다. 



다이고는 매일매일 죽음과 마주한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연령은 다양하다.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가족의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가장 끔찍하고 문제가 되는 죽음은, 가족이나 지인이 아니고 남에게 발견되는 사람들이다. 고독사 한 지 몇 주가 지난 후 발견된 노인, 호텔방에서 목을 메어 자살한 사람 등, 외롭거나 끔찍한 현실이 반영된 죽음은 납관사에게도 처리가 고된 일이다. 고독사 한 노인 거처는 입구에서부터 냄새가 진동한다. 시체 주위에 몰려든 벌레들, 먹던 음식인지 토사물인지 아니면 배설물인지 미끄덩한 액체가 바닥에 흐른다. 


납관사는 정성을 들이고 예의를 다해 시체를 닦고 수의를 입히고 얼굴 화장을 시킨다. 검정 정장을 입고 정확하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마지막 길을 치장해준다. 


마지막은 영화답게 가슴이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끝난다. 다이고는 삼십 년도 넘게 연락이 없었던 아버지의 부고를 전하는 우편물을 받는다. 아버지는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며 근근이 살았는데 단칸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칠십해를 넘겨 산 인생에 고작 남긴 것이 작은 사과 박스 하나 정도의 유품뿐이다. 시체 처리를 하러 온 사람들은 염습도 없이 그냥 관에 넣으려고 한다. 다이고가 본인이 처리하겠다고 나선다. 그리고는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다해서 아주 정성스럽게 염을 한다.


엔딩 크레딧이 나오는 동안 다이고가 능숙하게 납관을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클래식 음악과 어우러져 마치 무용 공연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죽음이라는 삶의 종착지에서 저렇게 정성스러운 납관사를 만날 수 있다면 왠지 안심이 될 것 같다. 






죽은 자의 빈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서 채울 수 없다. 그 자리는 죽은 자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 주위의 빈자리는 계속 늘어갈 것이다. 슬픔을 견디는 것은 나의 몫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그런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아주 잠시 인간으로 살다 가는 것임을, 계속 망각한 채 살아간다. 지인의 부고를 접하는 아주 잠깐의 순간만큼은 이를 의식하지만 곧 다시 잊고 만다. 마침내 내 인생의 마지막에는 죽음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 커버 이미지: <굿바이>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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