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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Jan 17. 2022

사연 있는 언니들의 스포츠, 복싱

feat. <밀리언 달러 베이비>, <파이터> & <백엔의 사랑>


피 흘리며 치고받고 싸우는 폭력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격투기나 복싱 시합을 보는 것도 즐기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여성 복서가 나오는 영화는 취향 저격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사연이 있다. 그래서 복싱을 시작한다. 복싱 꿈나무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10대의 열혈 운동선수가 아니다. 어찌 보면 체력 소모가 엄청난 복싱이라는 운동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에 복싱에 입문한다. 그들에게 복싱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자 삶의 의미이자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된다. 






여성 복서의 이야기에 그토록 끌리게 된 것은 십 수년 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본 후부터이다. 



감독이자 체육관 관장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음을 다친 외로운 노인으로 완고하고 강한 어른의 느낌이 물씬 난다. 힐러리 스웽크가 연기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주인공 메기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온통 혼자 짊어지고 가는 듯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무언가 이루어 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매기는 서른두 살로 복서가 되고 싶어서 체육관을 찾는다. 관장은 나이가 너무 많다며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그녀는 꼭 복서가 되고 싶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복서의 꿈을 키운다. 


그녀를 복싱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절박함이다. 지독한 노력으로 승승장구하던 주인공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이 영화는 승리를 찬양하고 인생의 행복한 면만 보여주는 헐리우드 스토리가 아니다. 그래서 엔딩도 충격적이다. 


주인공인 매기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복싱을 한 것일까? 한번 정도는 온몸을 불살라서 자신으로서 살아보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주위에서 아무리 안된다며 혀를 끌끌 찬다 해도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무작정 시작해서 자신의 인생이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한국 영화 <파이터>에서는 탈북자인 진아가 복서가 된다. 북한에서 군인이었던 그녀는 기본기가 있었다. 체육관 청소일을 하면서 답답한 현실에 신물이 나서 샌드백을 친다. 그런데 그 잽이 예사롭지 않다. 술에 절어 살아도 복싱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인 관장의 날카로운 눈에 바로 띄었다. 



진아의 앞에는 해결할 과제가 많다. 당장 본인이 먹고살아야 한다. 게다가 진아 때문에 다쳤다며 병원비를 물어내라며 지질한 남자가 추근댄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한 아빠를 한국으로 데려오려면 돈이 필요하다. 지금 처지보다 나아지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진아가 복싱을 시작한 이유다. 


상대방에게 얻어맞아 얼굴에 상처가 나고 약을 바르면 쓰라려도, 옥탑방에 누운 그녀는 웃음이 나온다. 한 가닥 희망도 없이 그저 너무 힘든 매일의 일상에, 게다가 가족을 버리고 먼저 탈북한 엄마에 대한 원망까지 겹쳐서 헉헉거리며 겨우 버텼던 인생길에, 무언가 몰입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내는 과정은 고되지만 뿌듯함과 만족감을 준다.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백엔의 사랑>은 구질구질한 인생들이 아주 다양하게 나오는 일본 영화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돈은 벌어본 적도 없고 방에 틀어박혀 밤새 게임을 하며 모태 솔로에 외출이라고는 동네 편의점에 들리는 것이 전부인 백수 이치코. 그녀는 늙어가는 부모에게 얹혀살고 있다.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여동생과 크게 싸우고는 난생처음 서른두 살에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단골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우연히 본 한 남자에게 마음이 끌려서, 그가 복싱을 하던 동네 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다. 생애 처음으로 몰두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바로 복싱이다. 얻어터지고 넘어지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다. 






대중을 열광시키는 인기 있는 스포츠도 아닌 복싱을 선택한 그녀들은 무패의 승리를 이어가는 최고의 복서가 아니다. 여성 복서들이 땀을 흘리며 몸을 만들고 꾸준히 연습, 연습, 연습하는 지난하고 정직한 그 길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분명 겁도 났겠지만 시합을 위해 링에 오른다. 그리고는 링 위에서의 시합에 최선을 다한다. 한 시합 한 시합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암담한 상황 속 돌파구 없는 일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복싱이었던 것이다. 


곧 이 세상과 하직해야 할지라도, 더 이상 복서가 아닐지라도, 평범한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지라도, 그녀들은 복싱을 하기 전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힘들고 지겨운 하루하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자신이 설 자리를 요구하고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온몸에 스며든 고통은 세상과 맞짱 뜰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표출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복싱을 하며 자신의 본연을 찾는 여정에 몰두하고 있을 멋진 언니들, 응원한다!




+ 커버 이미지: <밀리언 달러 베이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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