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러빙 빈센트> & <고흐, 영원의 문에서>
돈 맥클린의 ‘빈센트’를 무한 반복하며 이삿짐을 싸던 오후. 퇴근 후 서둘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흐 전시를 본 겨울밤. <별이 빛나는 밤> 월페이퍼로 모니터 화면을 꾸미고 컴퓨터를 켤 때마다 황홀해했던 어느 해 가을. 죽은 지 백 년도 넘은 고흐와 관련된 나의 추억이다.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몇 년 사이에 고흐에 관한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와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가 연이어 개봉을 했다. 비극적인 삶을 살고 광기 어린 에피소드를 남기고 사후 천재로 추앙받게 된 드라마 같은 인생은 확실한 반전이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이다.
하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가장 강력한 힘은 고흐의 그림 그 자체가 아닐까? 강렬한 원색으로 먼저 눈을 사로잡고 물감을 덧칠한 두꺼운 마티에르에서 작가의 손길과 마음이 느껴진다. 남프랑스의 풍경과 주변 지인들의 초상화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 세계는 빛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색의 변주에서 희열을 느끼고 대상 그 자체의 영혼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치열한 작가 정신을 반영한다. 고흐의 일상을 지배했던 우울함과 비극적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흐의 젊은 날은 지독히도 안 풀렸다. 갤러리 점원, 선교사 등 몇 가지 직업을 가지려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집안에서도 이미 포기한 자식이었다. 아버지는 고흐가 평생 경제적 독립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누군가의 짐이 되어 살아갈 것이라고 판단해버린다. 결국 그 짐은 남다른 형제애를 보여준 동생 테오의 것이 되었다. 어쩌면 이런 참담한 상황들은 신이 고흐의 짧았던 인생 동안 그림에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었을까? 결국 그림 그리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익히 알려져 있는 에피소드가 두 영화의 소재이다. 고흐가 고갱과 아를에서 같이 지내다가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을 거친 후 죽을 때까지의 이 년간의 이야기이다. 그 기간에 고흐는 여러 가지 정신이상 증상으로 고생하면서도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다.
<러빙 빈센트>는 우리가 고흐라는 화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으로 정확하게 살려냈다. 애니메이션이 시작되는 순간 익숙한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고흐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를에서 고흐와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우체국 직원인 롤랑이 있었다. 고흐는 롤랑뿐 아니라 롤랑의 부인과 아이들도 모델을 삼아 초상화를 그렸었다. <러빙 빈센트>에서는 롤랑의 장남 아르망이 고흐의 흔적을 찾아가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흐 그림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황금색을 띤 노랑과 다양한 변주로 나타나는 파랑이 펼쳐지는 화면은 압도적이다. 평면 그림을 입체적으로 되살린 이 애니메이션은 고흐가 바람과 햇볕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보여준다. 장면 하나하나가 고흐의 그림이 된다.
한편 <고흐, 영원의 문에서>에서 고흐를 연기한 윌렘 대포는 무례하리 만치 사교성이 없지만 주변을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화가를 생생하게 살려냈다. 1955년생인 윌램 대포는 촬영 당시 자신의 실제 나이와 거의 서른 살이나 차이나는 삼십 대 중후반의 고흐를 연기했다. 고흐의 자화상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처럼 닮았다.
감독인 쥴리안 슈나벨은 어떻게 고흐를 표현했을까? 현역 화가인 슈나벨은 역시 달랐다. 고흐의 일인칭 시점으로 영상을 구성해서 고흐가 주변에서 소재를 찾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한 번의 깔끔한 제스처로 단번에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고흐와 어떻게 칠할지 먼저 생각하고 계획해서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고갱. 이처럼 달랐던 그들은 마침내 각자 자신만의 기법으로 본인들 고유의 회화 세계를 창조해냈다.
영화에 나오는 몇 마디 대화, 특히 카페의 여주인장과 양치기 소녀와 나누는 대화에서 고흐가 얼마나 사교성이 없고 대책 없이 보이는지 극명히 드러난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려심이 깊고 감수성이 뛰어나고 친절한 면이 보이는데, 현실 생활에서는 그런 모습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 친절함과 사악함의 극과 극을 달린다. 조울증과 환청 등으로 고생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웃에게 말도 안 되는 난폭한 짓을 하거나, 그들에게 난폭한 짓을 당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전부였다. 고흐는 본인이 그린 그림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의 영혼과 마음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이리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에 따라 바뀌는 자연의 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을 보고 있는 고흐가 얼마나 황홀해하는지. 때로는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바닥에 벌렁벌렁 드러눕는 그가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감독인 슈나벨은 철저하게 고흐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불행과 외로움이 위대한 화가를 만들었다는 진부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오롯이 회화에 몰두하고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고 주변을 관찰하는 혼자만의 시간이 없었다면 고흐의 그림이 나왔을까? 백 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앞에 서면 가슴이 뛰는 해바라기와 아몬드 나무를 볼 수 있었을까? 풀어진 끈과 주름진 가죽에서 인생의 고됨이 느껴지는 장화와 소박하지만 단단한 나무 의자가 가슴 뭉클하게 하는 그림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 대가로 그토록 불행하고 외로워야 했을까? 가슴 한편이 살짝 베인 듯 아파온다.
나에게 고흐의 <아몬드 꽃(Almond blossom)>은 그의 외로움을 극단적으로 나타내는 작품으로 보인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렸다는 이 작품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 꽃이 활짝 핀 나무 윗부분을 묘사한 것이다. 예쁘지만 서글프다. 이제 새로운 가정이 완성된 테오. 그리고 귀여운 조카의 탄생. 축하할 만한 일이고 진심으로 기뻐하지만, 한편으로는 고흐가 완전한 외톨이임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고흐는 아를에서 지낼 때에도 자신의 가족(아내와 자식)이 없음을 한탄했다. 과연 평생에 그런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신세 한탄을 했던 것 같다. 우체부였던 롤랑 가족의 초상화를 하나씩 그리면서 본인만의 가족을 갖는 것에 대해 더 집착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고흐에게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동생 테오가 가정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질투가 나고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살아있을 당시 괴짜로 오인 받았을 고흐는 사실 당시 사람들에 비해 훨씬 앞서간 선구자적 생각의 소유자였다. 초상화를 통해서는 사진술의 유사함을 지향하지 않고, 모델의 생각과 영혼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본인이 위로를 받았듯이, 미술 역시 상심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커피가 고흐의 기호식품이었다고 하니 어쩐지 더욱 친밀감이 느껴진다. 고흐가 아를에 내려가 노란 집에 마련한 살림살이 중 하나가 커피잔과 커피포트였다. 파란색의 철제 커피포트, 로열 블루의 커피잔과 받침, 연한 코발트색과 하얀색 체크무늬의 밀크 저그를 샀다고 하니, 고흐의 심미안이 느껴진다. 작은 소품도 대충 선택하지 않는, 취향이 확실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노란색은 한 번도 내 인생의 색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흐에 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투박하리 만치 진한 고흐의 샛노란 색이 좋아진다. 무언가 노란색 물건을 사고 싶다. 아마도 노란 찻잔을 사게 될 것 같다.
+커버 이미지: <고흐, 영원의 문에서>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