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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Nov 17. 2021

옛 연인과의 재회

feat. <첨밀밀> <하나 그리고 둘> & <먼 훗날 우리>


아주 오래전에 읽은 수필 하나가 생각난다. 피천득의 <인연>. 처음 만났을 때 초등학교 어린이였던 아사코를 십수 년에 한 번씩 딱 세 번 만난 이야기. 두 번째 만났을 때 아사코는 청순하고 세련된 아가씨였다. 둘은 문학에 대해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고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딱히 연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꽤나 속을 끓이고 그리워했을 두 사람.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만남에서 본 아사코의 모습은 안쓰러웠다. 차리리 그 만남은 없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후회를 한다. 


과연 옛 연인은 죽기 전에 한 번 우연히라도 보는 게 나을까, 아니면 평생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게 나을까? 




개봉 당시 최고의 로맨스 영화였던 <첨밀밀>은 아주 성공적인 재회의 케이스를 보여준다. 홍콩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1997년에 처음 보았을 때도 아련하고 그립고 쓸쓸하며 다정한 이 영화의 느낌이 참 좋았다. 



영화는 1986년 홍콩에서 시작해서 1995년 미국 뉴욕에서 끝난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홍콩 사람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대거 이민을 떠났고 그들이 떠난 자리는 중국 본토 사람들이 메우며 살아간다.  


<첨밀밀>의 주인공 소군과 이요도 그렇게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온다. 둘은 누가 봐도 연인 사이이지만 서로를 친한 친구, 쓸쓸하고 외로우니 온정을 나누는 친구라고 정의한다. 소군은 어수룩하고 순진하고 촌스럽지만 책임감이 있고 한없이 다정하다. 이요가 남긴 만두 그릇을 건네받아 먹어치우고, 설거지를 끝낸 이요의 손이 차다며 행주로 감싸 쥐고, 밖이 춥다며 이요에게 자신의 외투를 입혀주고, 이요에게 주려고 바지 뒷주머니에 초콜릿을 넣어 두는 등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나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소군은 고향의 여자 친구 소정과 결혼하고, 부자가 되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똑순이 이요는 조폭 구양표의 애인이 된다. 


이요와 소군 사이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혹시나 감정이 드러날까 서로 조심하다 보니 같이 있는 시간이 어색해진다. 마침내 과부하된 감정은 폭발하고야 만다. 중화권 유명가수 등려군의 ‘Goodbye My Love’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어느 날 그들은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냉혹하고 복잡한 현실은 그들을 바로 맺어주지 않는다.



영화는 애틋한 재회로 끝난다. 1995년 등려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뉴욕 차이나타운의 한 가게 앞에서 TV에 나온 등려군을 홀린 듯 보고 있는 이요. 그 옆에 소군 역시 가만히 서서 화면을 바라본다. 마침내 둘은 서로를 알아보고 웃음 짓는다. 이혼한 소군과 구양표가 죽어서 혼자 남은 이요. 이제 둘의 의지만 있다면 거리낄 것이 없다.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장면인데 왜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가족이 있는 중년이 옛 연인을 만났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2000년에 개봉한 대만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 나오는 가장 NJ는 우연히 삼십 년 전의 첫사랑과 만나게 된다. 식물인간이 된 장모를 집에 놔두고는 속이 텅 비고 껍질만 남은 것 같다며 절로 들어가 버린 아내, 잘 풀리지 않는 회사일, 돌봐야 하는 아이들과 사고뭉치 처남 등 복잡하고 답 없는 일상에 지친 NJ는 첫사랑과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삼십 년 전 자신을 떠난 NJ에게 왜 그랬냐며 묻는 첫사랑. 둘의 관계는 과거에 얽매인 채 진전이 없다. 삼십 년 전 끝난 그대로이다. 그 당시 NJ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만큼 절실하지 않았나 보다. 사랑보다는 부담이 더 크게 다가온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는다. 본인의 현재 자리에 그대로 있기로 한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우연히 청춘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생겨서 인생이 확 변할 줄 알았는데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나저나 ‘우연히 청춘을 돌아보게 된 계기’라니……본인의 불륜을 이처럼 세련되고 완곡하게 고백하는 남편,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상대인 것 같아 무섭다. 


사실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여행은 의지였다. 그리고 NJ가 재회에서 기대했을 그 무언가는, 인생을 확 바꾸어 줄 주 알았던 그 무언가는, 결국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나 보다.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옛 연인과의 재회에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니 미련이 없어졌다고 봐야 할까?



2018년의 영화 <먼 훗날 우리>에서는 20대 시절 사귀었던 두 사람이 30대 초반에 다시 만난다. 한 사람은 여전히 혼자이지만 또 한 사람은 가족이 생겼다. 



남자와 여자는 비행기에 같이 타고 있다. 다행히 옆자리는 아니다. 그 사람이 맞는지 슬쩍 확인하려다가 눈이 마주친다. 어색한 웃음을 나눈다. 그래, 이젠 정말 어른이니까, 이런 상황 정도는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악천후로 비행기 운항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항공사에서 준비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묶으라고 한다. 


여자: 

베이징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서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연애는 족족 실패해서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우연히 같은 고향 사람인 너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 하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우리 상황을 참을 수 없었어. 네가 싫어진 게 절대 아니야. 뭐랄까……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더는 못 견디겠더라고. TV에 나온 너를 봤어. 성공할 줄 알았어. 이런 식으로 너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주치고 보니 참 당황스럽다.


남자: 

그토록 바라던 분야에서 성공해서 잘 살고 있었다. 결혼도 하고 첫 아이도 낳고 베이징에 괜찮은 집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지금!!! 나타난 거니. 내 인생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바로 직전 떠나버린 너에게 항상 미안했어. 사실, 너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너를 단단하게 잡아 주고 같이 걸어갈 자신이. 


하룻밤에 그들은 십여 년간의 인연을 정리한다. ‘만약’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미음 속에 가둬 두었던 아픈 감정을 꺼내 어루만진다. 하룻밤에 걸친 격정적인 질문과 대답은 마침내 담담한 헤어짐으로 마무리된다. 긴장이 감도는 장면과 장면이 이어지지만 감정을 억제하고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말이다. 




과거에 놓쳐버린 인연은 현재에는 유효하지 않다. 아쉬움에 한숨이 나오고 미련이 남아도. 그땐 ‘우리’였지만 현재에는 더 이상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재회가 의미가 있을까? 추억 속 과거를 불러내어 일부러 현재 진행형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수필 <인연>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마지막 만났을 때 아사코는 기껏해야 3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백합처럼 시들어가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때는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아사코. 저자는 아사코의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싱싱해야 할 그녀가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 차라리 그녀의 시든 모습을 모른 채 살아갔더라면 그동안의 만남을 설레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미소 지으며 회상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에 표현 못한 마음만 한없이 뭉그러진다. 


그러니, 백번 궁금해도 참는다. 추억이 있을 자리는 내 마음속이니까. 설 자리도 없는 현실로 소환된 추억은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으며 실망만 키울 뿐이다. 




+커버 이미지: <첨밀밀>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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