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단지 세상의 끝, 네브라스카 &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별 구별 없이 쓰던 두 낱말, 가족과 가정은 어떻게 다른 지 헷갈려서 찾아보았다.
가족 (家族)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가정 (家庭)
1. 한 가족이 생활하는 집.
2.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두 개의 뜻을 합치면, 가족을 구성하는 구성원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또는 공간이 가정이 된다.
사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가정이 존재한다.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위는 부모와 한두 명의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다. 이런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는 가정은 ‘결손가정’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차별과 결핍이 느껴지는 꼬리표가 달린다. 부모 없이 조부모와 손주가 같이 살면 ‘조손가정’이라고 하고, 부모가 한 명만 있으면 ‘한부모가정’이라고 하며 세세하게 분류를 한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진다. 통계나 복지를 위해 이런 용어와 분류가 필요하다고 치자. 왜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말들이 필요할까? 그냥 가족, 식구, 가정으로 끝나면 안 되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 마음속 한 구석에 나는 어떻게든 ‘결손’이 아니라 사회에서 주입시키는 ‘보통’의 가족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나는 적어도 ‘보통’ 그리고 그 단어가 은근히 암시하는 또 다른 뜻인 ‘정상’이라는 가정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결핍’ 따위 없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보통가족’의 범주에 든다고 해서 가족 구성원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의 삶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가족 간 갈등으로 전쟁 같은 하루하루가 계속될 수도 있고, 남들과 다른 성 정체성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민이 깊어지거나, 감옥 같은 가정의 울타리를 하루빨리 탈출하고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본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가족에 관한 영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세 개의 영화가 있다. 영화로 만들어질 만한 스토리를 품고 있는 가족이니,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상가족’의 테두리에는 들어가지 않는 가족들이다. 무언가 다르고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가족들인 것이다.
<단지 세상의 끝>은 소설가로 성공한 삼십 대 중반의 루이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십여 년 만에 고향집에 돌아와서 보낸 단 하루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는 가족 사이가 어색해지고 멀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짐작컨대 루이가 게이라는 것을, 엄마도 형도 여동생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루이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깡 시골에서는 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채 살 수가 없어서 파리라는 대도시로 올라갔을 테고, 거기서 비로소 시원하게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서로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잘 지낼 수도 없는데 단지 가족이기 때문에 얼굴을 봐야 하고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끔찍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겨우 단 세 시간 집에서 같이 지냈을 뿐인데 서로 간 대화는 허공에서 맴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서로 이해도 할 수 없다. 언어로는 도저히 서로 통할 방법이 없는 구성원의 집합체 같다. 결국 루이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고향집을 떠나게 된다.
그래도 본인의 자식이니까 세 자식 모두를 보듬으려는 엄마의 노력이 가슴 찡하다. 형수에게는 연민이 느껴진다. 천성이 착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하고 참고 사는 데 도가 튼 시골 아낙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초면인 시동생과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무식하고 불 같은 성격에 빈정거리기 좋아하는 남편이 사사건건 끼어들어 폭발 직전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보고 긴 여운이 남았던 영화 <네브라스카>는 로또의 허황된 꿈을 찾아 떠나는 칠십 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꿈을 깨 버리지 않고 묵묵히 동행해주는 아들의 로드무비이다.
치매 초기 단계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자애가 느껴진다. 성인이 된 자식과 노부모는 서먹서먹하다. 하지만 위기가 생기면 가족애를 발휘한다. 그리고 어릴 적 추억은 이런 가족애를 발동시키는 끈끈한 촉매제가 된다.
영화 속에서 큰 아들은 방송국의 잘 나가는 직원이다. 직장일과 본인 가족일로 바빠서 부모를 만나 뵐 시간이 없다. 둘째 아들은 큰아들에 비하면 속칭 ‘루저’의 느낌이 다분하다. 생활비나 대충 벌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싱글이니 큰아들보다는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어서 부모 시중들기는 둘째 아들 차지가 된다. 이 두 형제를 보면 자식을 결혼시킨 부모세대에 유행하는 말이 생각난다. “잘난 아들은 처갓집 자식이고, 못난 아들은 내 자식”이라는.
이십 대에, 늦어도 삼십 대 중반에는 대부분 부모가 되었던 내 부모님 세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처음 사는 인생인데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 모든 걸 다 알고 무슨 일이든 해결할 줄 알았던 부모님이 사실은 약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처음에는 엄청난 실망이 밀려온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그들은 못하는 것이 없는 우리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이 지나면 자식들은 깨닫는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저 소시민에 지나지 않음을. 어떤 자식은 반항을 하고 어떤 자식은 현실을 깨닫고 나이보다 일찍 성숙해진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자식은 부모를 돌보기 시작한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도 믿고 같이 해주기로 한다. 마치 우리 어릴 적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은 가족 갈등의 끝판왕이다. 가족 간 혼외정사, 사촌 간의 사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자매 등 과연 내가 저 상황이라면 정신 차리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엄청난 일들이 계속된다. 하지만 그런 인생도 있을 수 있겠다 싶다. 인생에서는 힘든 일이 하나씩 오는 게 아니라 떼로 몰려오니까. <프리티 우먼>에서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었던 줄리아 로버츠도 <트레인스포팅>에서 철없던 청년이었던 이완 맥그리거도 이 영화에서는 어느덧 중년이 되어 이혼의 위기를 겪으며 마음고생을 한다. 왠지 이 세상이 조금은 공평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처제와 바람을 피우는 형부가 없어서 우리 집은 다행이야. 저런 막장 가족 같으니......’ 약간의 우월감을 느낌과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가십에 열렬한 흥미를 보이며 타인의 불행에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다.
엿보기는 계속되고 내 행복지수는 올라간다. 덜 떨어지고 멍청해 보이는 사촌 동생이 없어서(정확히는 이복동생이다. 아빠와 이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니까), 사촌과 사랑에 빠진 착해 빠진 여동생이 없어서(사실은 남매끼리 사귀는 거다. 아빠가 같으니까), 내 딸을 후리려는 동생의 나이 든 남자 친구가 없어서 (불량스럽지만 돈이 있고 매력적이라 여자들이 항상 꼬일 것 같다). 행복할 이유는 수없이 많다.
결국 내 기준은 사회가 끊임없이 주입한 ‘정상가족’이라는 개념에 수렴한다. 영화 속의 막장 가족과 우리 가족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우리 가족이 ‘정상가족’에 좀 더 가까운 이유를 계속 찾아낸다. 그리고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 우리 가족 이만하면 정상이야.
+커버 이미지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