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홍차를 처음 마신 곳은 비행기로 남아있다. 노란색의 ‘립톤’ 티백 홍차에 레몬 슬라이스를 넣었다. 홍차 맛보다는 레몬의 신맛이 도드라지던 갈색 음료. 한번 맛본 뒤로는 항상 비행기에서는 홍차를 마셨는데 딱히 홍차 맛이 좋았던 것은 아니고 레몬 슬라이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굳이 준비해 놓지 않는 레몬 슬라이스는 해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만나는 내 나름의 특식이었다. 그래서인지 비행기와 홍차와 레몬 슬라이스의 조합은 항상 들뜬 기분을 만들었다.
도쿄에서 마신 녹차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점심시간을 놓쳐 쇼핑몰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샌드위치 등 간단한 요기거리와 디저트를 파는 곳이었다. 일행과 함께 샌드위치와 디저트 몇 개,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전혀 마시지 않던 음료인 녹차를 주문했다. 아침부터 이미 커피를 몇 잔 마신 터라 또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다는 굉장히 단순한 이유였다. 앙증맞은 일 인용 유리 티팟에 녹차가 나왔다. 차가 우러나자 작은 유리 티팟은 온전한 찻잎모양을 한 조그마한 초록색 잎으로 가득 찼다. 찻잎을 눈으로 보면서 마셔서 인지 녹차가 굉장히 맛있게 느껴졌다. 회사 탕비실에 있는 현미 녹차도 식물 잎일까? 온전한 잎을 간직하고 있던 카페의 녹차와 내용물이 잘 보이지 않는 티백 속 현미 녹차를 같은 종으로 인식하기엔 비주얼의 간극이 너무 컸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모두들 강제적으로 집콕을 하게 된 시절,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커피를 줄일 요량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즈음 <일일시호일>이라는 영화를 봤다. 이십 대 초반의 노리코가 이십여 년도 넘게 다도를 배우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잔잔한 이야기였다. 노리코에게 다도는 처음에는 까다롭고 어려운 수업시간이었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알아가고 익숙해지니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명상의 시간이 된다. 다도선생님은 지금 이 순간을 강조한다. 이 순간은 일생의 단 한 번이라고. 누구와 차를 마시는 것도 단 한 번이 될 수도 있으니, 매 순간 정성을 다하라고 한다.
나에게 차 마시는 시간은 노리코에게처럼 대단한 성찰의 시간은 아니다. 잠시 쉬어 가는 여유를 부리거나 커피대신 마시며 일의 효율을 높이려고 차를 마신다. 영국 영화 <다운튼 애비>를 보면 대저택을 배경으로 귀족들의 티타임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하인들의 티타임이 확연하게 대비된다. 손님 접대용으로 화려한 테이블 세팅을 하고 여유를 부리며 차를 천천히 마시는 귀족의 티타임보다는 일하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기 위해 차를 마시는 하인의 티타임이 지금 나의 차생활과 닮았다.
영화 속에 차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그들은 어떤 태도로 티타임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나와 같은 궁금증이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지 영화 속에서 차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엮은 책도 출간이 되었다. <영화 차를 말하다>와 <영화 차를 말하다 2>이다. 각각의 저자들이 총 24편의 영화를 소개하면서 차에 관한 역사와 정보를 자세히 풀어낸다. 우리나라 영화 속 차 이야기도 소개를 하지만, 주로 중화권과 일본 그리고 영국의 영화가 주를 이룬다.
첫 번째 책에는 총 13편의 영화가 나온다.
1. 역린
2. 경주
3. 자산어보
4. 협녀,칼의 기억
5. 천년학
6. 리큐에게 물어라
7. 앙: 단팥 인생 이야기
8.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9.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
10. 일일시호일
11. 와호장룡
12. 다운튼 애비
13.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두 번째 책에는 11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1. 화양연화
2. 인생
3. 무인 곽원갑
4. 적벽대전
5. 해어화
6. 너의 이름은
7. 차의 맛
8. 죽은 시인의 사회
9. 덩케르크
10. 미스 포터
11. 센스 앤 센서빌리티
나는 이 리스트에 두 가지 영화를 추가하고 싶다. <티타임>과 <여배우들의 티타임>이다.
칠레 영화감독 마이테 알베르디의 다큐멘터리인 <티타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0년 이상 매달 티타임을 갖는 동창모임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찍을 당시 80대 초중반인 할머니들은 티타임을 즐기며 솔직한 대화를 이어 나간다. 모여서 달달한 디저트를 먹고 수다를 떠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엿들어보면 인생의 단맛과 쓴맛이 다 들어있다.
칠레 출신 영화감독인 마이테 알베르디가 만든 다큐멘터리 <티타임>을 다시 봤다. 몇 년 전에 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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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다큐멘터리인 <여배우들의 티타임>은 사실 제목에 낚였다. 잘 차려진 티 테이블과 우아한 다기, 화려한 꽃 장식 그리고 노배우들의 한가하고 평화로운 시간 보내기, 이런 것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린다. 티타임이란 티를 마시는 시간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는 무는 수다를 떠는 시간이다. 차를 마셔도 좋지만 물이나 술이어도 좋다. 이 모든 시간이 그냥 티타임으로 뭉뚱그려진다. 우리가 티타임에 기대하는 것이 이런 것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말에 낄낄거리고 추억도 팔고 서로 놀리기도 하고 유머도 섞다가, 시간이 무르익으면 아주 가끔씩은 솔직한 마음속 이야기를 하게 되는 시간 말이다.
차는 혼자 마셔도 좋고, 같이 마셔도 좋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마셔도 좋다. 시간이 된다면, 마음이 끌린다면, 아무튼 언제나 티타임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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