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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Jun 16. 2024

홍차, 원산지가 영국??


“I don't drink coffee, I take tea, my dear.”


이렇게 시작하는 스팅의 노래 <잉글리시맨 인 뉴욕(Englishman In New York)>은 영국인의 특징으로 커피가 아니라 차를 마신다는 점을 꼽는다. 영국이 배경인 영화에는 여왕, 귀족, 하인 등 계급에 관계없이 티를 마시는 장면이 즐비하다. 대중문화로 접한 영국의 대표 이미지는 티타임이었다. 그리고 이제 ‘영국’ 하면 ‘홍차’가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한동안 홍콩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욜로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홍차가 영국 고유의 음식이라 여겼다. 영국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홍콩에서 영국의 티문화를 경험해 보겠다며 관광객 모드로 부지런히 애프터눈티를 마시러 다녔다. 아직 차를 즐겨 마시지 않던 시절이었고, 나에겐 여행자의 들뜬 마음에 부응하며 허영심을 채워줄 분위기가 훨씬 중요했다. 그래서인지 도대체 무슨 티를 마셨고 어떤 맛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홍콩의 애프터눈티를 보면 카페를 찾아갈 때 기분 좋게 들떴던 기억과 친구와 시시덕대던 시간이 떠오른다. 핸드폰 사진기가 보편화되기 전이어서 모든 사진은 디지털카메라로 찍던 옛날이었지만, 사진 속 티푸드는 여전히 먹음직스럽고 풍성해 보이고 조명이 큰 역할을 하는 카페의 분위기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워서 언젠가 꼭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국은 홍차의 종주국인 된 것일까? 마치 차가 중국에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영국의 산물인 것처럼 보여질 정도로 국민 누구나 즐기는 음료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포르투갈에서 온 브라간사 왕가의 캐서린이라는 여인 덕분이다. 차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캐서린은 1662년 영국 왕 찰스 2세와 결혼해 영국으로 온다. 캐서린은 포르투갈에서 인도의 항구도시 봄베이를 포함해 엄청난 지참금을 가져왔다. 또한 차도 가지고 와서 영국 왕실에 처음으로 차 마시는 문화를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라는 책에서는 영국에서 상류사회의 전유물로 시작된 17세기 티타임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대중화되어 가는지를 알려준다. 영국 왕실과 귀족에게 차가 새로운 유행이 된 초창기에는 차에 부과되는 세금이 너무 비싸 귀족만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전해진 ‘펀치’는 집안에서 파티를 열 때 등장하는 음료로 독주(브랜디나 럼)에 감귤류 과일과 차를 넣어 만들기 때문에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될 정도였다.

 

영국이 인도에서 19세기 중반 차 재배에 성공하자 중국으로부터의 차 수입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게 되었고 차 가격도 낮아진다. 마침내 영국에서는 계급에 관계없이 차를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에는 영국에서 19세기 후반 홍차가 대중화되고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는 찻집이 생기면서 차가 여성의 지위 향상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나온다. 포르투갈에서 온 왕비 캐서린은 자신이 영국에 소개한 차 한잔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셀프서비스인 체인점 찻집이 있는가 하면 웨이트리스가 서빙해 주는 상류층 대상의 찻집도 있었다. 특히 소규모 찻집은 여성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소규모 찻집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마침내 1918년 영국 여성은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다. 


차 한 잔이 여성의 지위 향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찻집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차를 마시는 그 시간에는, 차는 그냥 음료가 아니라 영험한 효력을 발휘하는 마법의 생명수로 재탄생했다.


 




한편 <티타임: 세계인이 차를 즐기는 법>이라는 책은 저자가 영국인이고 영국은 홍차의 나라인 만큼 영국의 티타임 역사와 문화에 관해 자세히 알려준다. 


차는 성인들만 즐긴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너서리 티'라는 티타임이 있었다. 보통 저녁식사에 해당해서 속을 든든히 채울 수 있는 음식과 우유, 코코아, 주스 등을 마셨다고 한다. 때로는 우유에 진하게 우린 홍차를 아주 조금 넣어 마시기도 했다. 


차는 스포츠를 즐기는 시간에도 빠질 수 없었다. 테니스, 크리켓, 당구를 치면서도 중간에 티타임을 가졌다고 한다. 1910년대에는 호텔에서 차를 마시면서 탱고를 추는 '티댄스'가 유행했다. 런던의 월도프 호텔이나 사보이호텔 같은 최고급 호텔의 로비 라운지나 야자수로 장식한 아트리움인 팜코트에서 열리는 티댄스는 그 당시 사교계에서 엄청난 인기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티댄스'보다는 프랑스어로 '테당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고 하니 역시 어느 시대나 허세가 먹힌다. 하지만 이런 화려하고 즐거운 시절은 1939년 월도프 호텔의 팜코트 유리 천장에 독일군의 포탄이 떨어지면서 끝을 맺는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영국인들은 줄기차게 차를 마셨다. 양차대전동안 일반국민에게는 홍차 배급제가 실시되었지만, 전장에는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차를 충분히 공급했다고 한다.

 

영국인들에게 차는 일상의 음료일 뿐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이벤트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다. 심지어 과거에는 장례식에 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기 위해 질 좋은 차와 티푸드를 성대히 준비하다가 빚을 지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 


홍차의 원산지는 영국이 아니지만, 홍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면 영국을 따라갈 곳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 영국인의 홍차 사랑은 정말 유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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