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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방울 Jun 23. 2024

차나무, 꼭 훔치고 말겠어!


전라도에 있는 절에 템플스테이를 간 적이 있다. 주말에 1박 2일의 여정이었는데, 절에서 짠 프로그램대로 움직여야 하는 템플스테이였다. 사실 정해진 일정 없이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지키고 혼자 자유롭게 어슬렁거리며 지내는 쪽이 성향에 맞는다. 하지만 프로그램 중 하나가 ‘차 만들기 체험’이었고 여기에 홀랑 넘어가 버렸다.

 

봄날 대낮에 도착한 사찰 주변은 싱그러웠다. 습도가 조금 높은 날이어서 절 입구의 개울과 나무가 있는 풍경은 포커스가 맞지 않은 사진처럼 뿌옇게 몽환적으로 보였다. 절에서 받은 옷으로 갈아입고 모든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다음날 오전에 할 차 만들기 체험만 고대하고 있었다.



템플스테이에 온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해진 시간 안에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하는 발우공양은 밥을 빨리 못 먹는 사람에게는 은근히 힘든 일이었다. 저녁 9시에 취침을 했지만 잠은 오지 않고 눈은 말똥말똥. 새벽에는 문밖의 목탁소리에 놀라 겨우 일어났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108배는 한번 해보고 싶어서 용을 썼다. 드디어 차 만들기 체험시간이 돌아왔다.


 

그런데...

비가 와서 차 만들기 체험을 취소한다는 거다. 헐...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 대신 실내에서 염주목걸이 만들기 체험을 했다. 

뭐냐고... 차나무와 염주를 바꾸다니...

절을 떠나며 절 뒤에 있는 차 밭을 슬쩍 쳐다본 게 차 체험의 전부였다. 정작 찻잎은 만져보지도 못한 채. 



아쉬움이 남아 친구에게 얘기를 하니 차나무도 화분에 키울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니, 차를 관상용 식물처럼 집에서 키울 수 있다고? 이렇게 쉬운 애였나, 차나무가...

그 이후 차나무를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싹 사라졌다. 






한동안 내 욕망의 대상이었던 차나무는 사실 옛날 영국인들에게는 찾기만 하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 보물선과도 같은 존재였다. 중국에서 차나무 종자를 찾아내 무사히 훔쳐올 수 있다면 말이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몰래 퍼뜨려 많은 사람들이 중독되게 만들고 두 나라 간 아편전쟁이 일어난 것도 결국 차 때문이었다. 영국이 차를 수입하는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늘어서 중국과의 무역에서 손실을 보자 이를 만회하고자 이런 끔찍한 일을 계획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초목 전쟁>은 그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묘사하고 있다. '로버트 포천'이라는 영국인이 19세기 중반에 어떻게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몰래 훔쳐냈는지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서 흥미롭게 들려준다. 


영국에서 흙수저로 태어난 로버트 포천은 품팔이 농사꾼이었던 아버지에게 농사의 기본 지식을 배우고 원예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는 야망이 컸던 많은 평민 영국인들처럼 영국 제국주의 팽창을 기회로 삼아 신분상승과 재산증식을 노린다. 본인의 원예 경력을 활용해 중국의 다양한 식물을 채취해서 영국으로 옮겨오는 일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동인도회사는 로버트 포천에게 중국의 차나무 씨앗이나 묘목을 가져오고 차 재배와 가공방법을 알아내라는 임무를 맡긴다. 포천은 차나무를 찾기 위해 안후이성에서 우이산까지 중국의 차산지를 샅샅이 헤집고 다닌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중국인처럼 변장하고 차나무 묘목을 손에 넣을 때까지 위험한 여행을 계속한다. 책에는 아편에 찌든 중국 사람들과 태평천국운동 등 당시의 시대상도 상세하게 나온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로버트 포천은 '워디언 케이스(Wardian Case)'를 이용해 중국에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까지 차나무를 안전하게 옮기는 데 성공한다. 지금으로 치면 산업스파이 노릇을 아주 제대로 해 낸 것이다.

 

영국의 너새니얼 배그쇼 워드가 발명한 '워디언 케이스'는 외부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 유리상자로,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장치이다. 유리 상자 안에 흙을 넣어 씨앗이나 묘목을 심고 빛이 잘 드는 곳에 두면 초목은 흙 속의 수분과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와 수증기를 내보내는데 이 수증기가 유리에 응결했다가 다시 아래로 흘러서 흙을 적신다. 이렇게 수분이 무한히 보존되는 과정이 반복되면 상자 안의 식물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차에 관련된 역사를 알게 될수록 ‘차’라는 식물이 인간사에 끼친 엄청난 영향에 놀라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의 욕망과 탐구정신이 더해져 이제는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차를 재배하고 있고 수많은 품종의 차나무가 탄생했다. 차를 골라 마시는 즐거움이 없는 세상? 상상하기도 싫다. 차는 역시 요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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