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청춘 그 매력에 대한 이야기
"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가슴속에 있는 것이니까"
모모 6장 P77
시간은 일초 일분 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 이렇게 순서대로 공식처럼 흐르지 않는다. 늙는다는 건 일 년이 가고 또 일 년이 가서 한 살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인 근거 가봐야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시간이 24시간이라서 그게 하루인 것이고 지구가 태양주의를 한 바퀴 도는 공전시간이 365일이라는 시간인 일 년인 것이다.
우린 그런 사실을 시간이라 부르고 있다. 시간은 한해 한해 한해 미적분처럼, 로그 함수처럼, 난해한 수학이 칠판 위에서 숫자와 기호로 풀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풀어지지 않는다. 시간은 어느 날 순식간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에게 50살이라는 숫자를 턱 하니 내려놓는다. 그렇게 우리는 한순간에 나이를 먹는다. 백튜더퓨쳐의 영화 주인공처럼, 눈 비비고 바라본 현실은 어른이었다. 서서히, 천천히, 느리게, 될 수가 없다. 마치 옷 갈아입듯이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듯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공평함을 이런 데서 찾는다.
나이 듦이란 어딘가에 꼭꼭 숨었다가 재미 없어질 때쯤, 다들 집으로 돌아갈 때쯤 그제야 손 털고 나타나는 술래잡기와 같은 것이다. 그냥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가끔 지구는 태양 주의를 돌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게 시간이다. 내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중력은 나를 꼼짝 못 하게 잡아당기고 있다. 살아가는 이유를 중력이 잡고 있어서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일상의 일탈을 꿈꿀 수 없는 나이, 자전축에 매여 돌아가는 행성처럼 그 시간을 살아가는 나이가 중년인 것이다.
중년은 잃어버린 것을 알게 해주는 마법을 지녔다. 중년은 잃어버린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게 해 준다. 잃지 않는다면 모를 일 들이다. 하나하나 잃어버려야 다른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세상 모든 만물은 순환하고 결국엔 균형을 이룬다. 이것을 알아감이 나이 듦이다.
중년의 청춘은 삶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에서 찾아온다. 그런 여유는 다른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생각의 유연성으로 만들어진 단단함과 차분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중년의 청춘은 사색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이며 그렇게 쌓인 삶의 관록은 지혜의 눈이 되어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거울 속에 나를 쳐다본다. 안 봐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익숙한 나를, 눈가의 잔주름과 입술주의 팔자주름과 나 아니면 절대 모를 작은 점들과 그런 것 하나하나를 매일매일 본다.
아버지를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알아가듯 시간은 그렇게 기브 앤 테이크로 흘러간다.
사람의 눈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장 많이 보고 살아간다. 그만큼 자기에 관대하고 자기 모습에 흠뻑 젖어 살아간다.
하버드대 늙지 않은 장수의 비결 연구팀들이 집필한 "노화의 종말" 이란 책을 보면 몸을 차갑게 유지할 것과 간헐적 단식을 제안하고 있다. 일반적인 소식 균형 잡힌 식단 규칙적인 운동 양질의 루틴 생활습관등과 더불어 몸을 차갑게 유지함으로써 지방을 태우는 갈색지방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침실온도를 19도로 낮추어 체표온도를 떨어뜨리면 수면 중 지방이 소모되는 효과가 있으며 혈당수치를 낮춰 주고 당뇨병 성인병 예방에 좋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절식을 통해 주기적인 열량 제한은 균형 잡힌 에너지원 공급을 극대화시킨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뜨끔했다. 장수하진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만큼 행하지 못하고 사는 게 중년인 듯하다. 비겁함에 익숙하고 관계에 무뎌지는 게 나이 듦 인 듯하다.
올해 내 나이는 52살이다. 흔히들 말하는 중년이다. 이 나이가 되면 삶에 치열함 보다는 여유와 관록이 주는 안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들 다르겠지만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나 역시 선택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풍족하고 넘쳐나는 넉넉한 삶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이 나이가 되면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랩보다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발라드나 애절한 창법의 트로트나 7080 노래를 더 즐겨 듣게 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 정확히는 45세를 넘기면서부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젊었을 때 누려 보지 못한 호사다. 그 호사는 삶을 윤기 있고 찰기 있게, 오감의 촉수를 예민하고 쓸만하게 만들어 준다. 나이 듦에 대한 보상 일 거라 어깨를 다독인다.
헬스장보다는 동네 앞산이나 둘레길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와이프가 사 오라는 식료품 장보기가 당연한 듯 꼼꼼히 싱싱한 상품을 고르려 품을 드리게 된다. 바지 하단 폭이 그리 넓지 않은 청바지와 검은색 터틀넥을 즐겨 입는다. 그래도 겨울이 되면 여러 벌의 내복을 준비해서 번갈아가며 입는다. 마음은 늘 청춘이건만 바지단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이 싫어진다. 그렇게 싫어하는 배바지 패션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배꼽주위로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허리띠를 풀어 윗도리를 바지 속으로 밀어 넣는다. 딱 그 정도 되면 싫든 좋든 그냥 아저씨가 된다. 패션테러리스트 목록에 올라간다. 아직은 베이지색 면바지와 갈색 단화를 즐겨 신는다. 젊었을 때 자주 입던 재킷보다는 편한 스포츠 의류나 골프 의류를 자주 입는다. 보이는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우선은 입어서 편한 의류를 선택하게 된다. 가죽소재의 고급 서류가방보다는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검은색 노스페이스 스포츠 가방을 메고 다닌다. 디자인보다는 기능성을 따지게 된다. 친한 친구의 부친상에는 20만 원 정도 부조금을 낸다. 거래처 직원의 결혼식이나 고객사 관계자들의 조문상에는 10만 원 정도를 부조한다. 차만큼은 포기 못하고 최고급 SUV를 몰고 다닌다. 대부분의 중년들은 타고 다니는 차에 반응하다. 안전성과 중후함 두 가지를 고려하여 선택한다. 여자들이 백에 치중하듯 남자들은 차에 올인한다. 문득 내 나이가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내 나이가 맞는데 누군가 나이를 물었을 때 그 사람 나이가 50대라고 하면 오래된 어르신으로 느껴진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보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다른 사람과 인사할 때라야 느끼게 된다. 감정의 객관화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중년이란 그런가 보다. 모든 감정이 둥글둥글 해진다. 사회 정의보다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 성당을 다닌다.
머리숱이 풍성하지는 않지만 이마가 훤히 벗어지지는 않았다. 그 덕에 아직은 나이보다는 동안 소리를 들으며 지내고 있다. 아직도 키워내야 한 두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장난치는 걸 보면 매년 건강 검진을 받으며 걱정을 한다. 건강검진을 받고 나면 몸에 좋은 거를 찾아 먹게 되고 여러 비타민도 주문을 한다. 20대 내가 바라본 오십이라는 나이와 오십이 되었을 때 내가 겪고 있는 오십이라는 시간은 많은 결이 다르다. 중년이라는 단어의 개념과 내용도 다를 것이다. 건강관리공단에서 관리하는 중년이라는 나이 때의 기준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오십과 지금의 50은 많이 다른 것 같다.
나의 52살은 온갖 사물과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조금씩 감정을 잃어가며 그 대가로 나이라는 숫자를 얻은 듯했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나 다시 살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인생을 더듬어가며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잃어버린 감정과 잃어버린 인생들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나 자신이 되는 것 말고 또 다른 길이란 없는 듯하다. 먼 곳을 돌아 다시 되돌아온다 해도 나는 언제나 거기에 머물면서 내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