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산책에서 만나는 것들
"결속력 없이도 행할 수 있는 다정한 관계, 목적 없이도 걸음을 옮기는 산책, 무용한 줄 알지만 즐기게 되는 취미생활, 이름도 알지 못하는 미물들에게 잠깐의 시선을 주는 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 싱거운 대화, 미지근한 안부, 식물처럼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는 일, 인연이 희박한 사람, 무관한 사람, 친교에의 암묵적 약속 없는 사람과 나누는 유대감, 수수한 마주침을 누리는 시간이 나는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사람은 목소리와 표정과 손길로 실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좋았던 시간에" P245 김소연 산문집
이쁜이는 샤부 샤부를 먹으러 가자며 집 앞 재래시장 쪽을 가리켰다. 대로옆 상가들의 입간판을 쳐다보며 샤부샤부 집을 분주히 찾아 나섰다. 항상 오가던 길인지라 웬만한 상가들은 금방 알 수 있었는데 샤부샤부집은 생소했다.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핫플레이스 족발집과 반찬가게 그 옆으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옛날 통닭집과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동네 아낙들로 시끄러운 야채 가겟집과 간간히 드나드는 손님이 있는 분식집과 바다 비린내가 얼핏 묻어나는 횟집, 슈퍼가 없어진 자리에 들어선 편의점과 두세 곳의 옷가게들 그 정도가 눈에 보이는 상가들 이였다. 그 옆으로 동네 할아버지들이 모여 바둑과 장기를 두는 작은 공원이 있고 그곳을 지나쳐 더 걷다 보면 지하철역이 나오게 된다.
"샤부샤부집이 어딨어 도로변에 없는 듯한데 "
"신호등 건너서 저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야 돼 "
"태현이 엄마랑 같이 왔었는데 맛있어"
저녁 시간이 가까워 오자 궂은 하늘은 가는 빗줄기로 바뀌어 갔다. 쏟아붓는 정도는 아니어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신호등을 건넜다. 눈을 감고 걸으면 가는 빗줄기는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냄새로는 알 수 있다. 내리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내려앉는 비가 풍기는 내음은 간미롭다. 검은 우산이 받아내는 빗소리가 중독성 강한 비트 음악처럼 마음을 편히 만들어준다.
인도옆으로 트인 골목길로 접어들자 입간판이며 상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건물 위로는 빨랫줄이 길게 걸쳐 있는 듯 전선줄이 건물과 건물 사이로 거미줄처럼 연결 되어 있었다. 몇 발자국만 되돌아 나가면 눈에 익은 거리와 건물들이 있어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골목길을 돌아 들어서자 전혀 다른 세계로 온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주변 환경은 낯설었다.
우선은 낮은 이삼 층짜리 건물들이 골목길 양옆을 잇고 있었고 편의점과 짜장면집 옆으로 샤부샤부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골목길의 풍경이 마치 먼 곳 낯선 곳 여행 끝자락 우연히 들른 정감 가는 곳을 찾아낸듯한 기분이 들었다. 장가계라는 짜장면집 간판이 건물의 반이상을 차지하며 붙어 있는 게 마치 간판에 건물이 붙어 있는 듯했다.
골목 안은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으로 닿아 있지 않았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동굴문이 열려 있는 듯, 그곳을 거닐다 보면 대로변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차바퀴소리 경적소리는 누군가와 나누는 은밀한 말소리에 지워진다.
골목길은 대로가 품을 수 없는 것들을 품고 있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하는 곳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상가 건물들을 지나 집들이 잇닿아 있고 집들은 대개 빨간 벽돌로 된 이층 양옥집들이다. 그런 집들을 지나가며 돌담 너머로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나무들과 계단을 흘끗 쳐다본다. 어떤 사람들은 늦은 아침일 수도 있을 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른 점심을 일수도 있는 그런 식사를 하고들 있었고 텔레비전 드라마도 보고 있었다. 빠르지 않은 정겨운 건반 소리가 피아노학원에서 들려오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의 양갈래 머리카락도 보인다. 그 위로 이층 창문으로 우렁차게 기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흰 태권도복을 입은 꼬마들이 단체로 떼창 하며 성실히 훈련하는 목소리 일 것이다.
골목은 대로가 품을 수 없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을 품은 체 시간으로 존재해 있다. 거기에는 온갖 것의 음식냄새가 열어 놓은 창문이나 행인의 옷깃을 통해 길목으로 유랑을 한다. 한 곳에 담기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굴러 떨어지는 구슬처럼 현실의 일상이 골목으로 넘쳐흐른다. 그곳에는 거기에 없던 것들이 소리가 되어, 냄새가 되어, 형태가 되어, 이야기가 되어, 표정이 되어, 감정이 되어 머물고 흐르기를 반복한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ᆢ
"맛있다"
목덜미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샤부샤부를 먹었다. 살짝 데쳐서 간장소스에 찍어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골목길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했다.
친한 선배가 한 명 있다. 그 선배는 이런 골목길을 자주 걸어 다니곤 한다. 보통은 어느 카페에서 만나자고 약속들을 하는데 반해 그 선배는 어디 앞에서 보자고 약속을 한다. 그러곤 그 주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사는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주변 풍경 속으로 걷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높지 않은 담벼락에 기대 서있는 감나무가 가던 길을 멈춰 세운다. 용케도 주렁주렁 매달린 주황색 감들을 마냥 신기해하며 옆집으로 넘어가버린 주황색 감 몇 개를 손짓하며 색깔 곱다 칭찬을 한다.
개 짖는 소리에 놀라 다시 가던 길을 걷는다. 옥탑집 앞마당에서 느릿하게 마른빨래가 출렁 인다. 좁은 골목길을 급하게 빠져나가는 오토바이 몇 대가 지나쳐 간다. 창문 너머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엄마의 웃음소리가 절묘한 화음으로 골목길을 채워 나간다. 사람 사는 냄새가 여기저기 일상의 풍상으로 피어오른다. 걷다 보면 보게 되고 걷다 보면 듣게 된다.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햇볕이나 바람처럼 있어야 할 그곳에서, 골목길의 풍경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순간 어제 라디오에서 들었던 몇 마디가 생각났다.
"행복은 강도(強度)가 아니라 빈도(頻度)에서 온다."
소확행이 어디 따로 있을까!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잊힌 것들과 일상의 소중함이 덩어리 져 찾아온다. 그때 갖춰야 될 거라곤 눈앞에 펼쳐져 걷는 데로 나에게 다가오는 골목길의 정겨움을 말로 와르르 쏟아내지 않고서도 풍성하게 느끼게끔 해주는 감정을 부여잡는 것, 침묵하며 즐기는 것, 그 귀중한 순간을 즐기는 것ᆢ 단지 그뿐이면 충분하다.
이미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어떤 물질로도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골목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