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처서가 지난밤공기는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 시간의 질서가 촉감으로 다가오는 계절이었다 어디 볼 수 없는 것들의 놀라움이 시간뿐이겠는가? 새벽 찬이슬을 맞으며 빨간 고추를 따고 계실 늙은 아버지의 한결같은 감정과 그 감정의 기운으로 일구고 심고 기르고 거두는 섭생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 내시는 삶 또한 놀라움 아니겠는가!!
가을 향기가 베란다 창문으로 밀고 들어온다
가을 향기는 객체가 아닌 주체로써 다가온다 가을 향기는 저무는 모든 것들의 총합으로 가진 힘을 뿜어낸다 가을 향기는 풍성하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흙 내음 가득 품고서 저며간다
볕 좋은 날 가을은 바스락 되며 익어간다. 그렇게 가을볕은 가을을 만들어 간다. 햇볕의 밀도는 강해져 산의 마름을 재촉하고 하늘색은 깊고 높아져 헐거워져 간다. 가지고 있는 자기 색을 버리고 담백한 수묵화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가을빛들은 산자락을 물들여 나가고 산맥의 습기와 녹음을 쫓아 버린다.
가을의 산들은 취하고 버릴 것들에 집중을 한다 곧 다가올 추위에 대비를 한다.
빈 공간을 가득 메우는 풀벌레 소리가 귓속으로 젖어 들어오고, 귀뚜라미 여치 그 외 이름 모를 풀벌레 무리들의 장단과 화음은 애틋하게 나를 끌어당긴다. 풀벌레 소리는 존재로써 다가온다 울지 않는 풀벌레는 의식밖에 존재했고 울어 대는 그 소리는 후손을 낳고 왔다 갔다는 것을 알리려는 자연의 섭리로 읽혔다 가을이 내려오고 있다 비 내리듯 눈 내리듯 소리 없이 자분자분 산에서 가을이 내려오고 있다 산이 여위어 간다 가을이다!! 고추밭으로 가을이 내려앉는다 가을볕으로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은 새벽이슬을 머금어 낱알이 단단해져 간다 잎을 버리고 가진 것을 버려서 그 마름을 양분 삼아 작물들은 기름져간다 뿌려진 것들을 거두려 함일까!! 가을은 말이 없다. 그 작은 것들이 그런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낸다 알맞은 땅에 흩뿌려져 진 낱알들은 깊은 곳으로, 뽑히지 않을, 충분히 길여 올릴 물길을 찾아 뿌리를 내린다 길어 올린 물든 중력을 거스르며 혈관을 따라 줄기와 잎으로 햇볕을 향해 올라간다 그들의 본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스스로 양분을 찾고 에너지를 만드는 유일한 존재는 존재로써 만물과 상생의 길을 엮어 나간다
풍경과 소리와 향기와 촉감을 촉수로 만져지는 모든 것들을 글로 써 내려가고 싶다 너와 나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글을 ᆢ
글들이 꿈틀거려 새벽잠을 깨웠다 어깨를 만지고 머리를 흔들고 의식 속을 헤집었다 글들이 잠을 깨우긴 처음이었다 생각을 글로 옮겨 놓는다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정처 없는 것들을 잡아 두려 무거운 닻을 내렸다 달아나지 못한 것들이 날 걸로 잡혀 들어 활자로 남겨졌다 퍼덕이며 언어들이 말을 걸어온다 쓰려하지 않아도 써질 때가 있다 언어의 밀도와 순도는 생각만큼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쓰기를 계속 이어 나간다면 양생의 습관이 만들어질 것이다 존재를 일깨워 주는 작은 것들에 감사할 따름이다 기억을 글로 적기도 하고 지금처럼 계절의 변화를 적기도 한다 주변의 이런저런 사는 모습을 인터뷰하듯 써 내려가고 싶다 쓰다 보니 서있는 곳의 공간이 보인다 깊이와 거리가 입체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버지 엄마가 나를 데려 놓고 집으로 가던 날 중학교 일 학년 남자아이의 눈물이 떠오른다 좀 더 야무지지 못했던 시골 아이가 바뀐 서울 환경에 힘들어했을 그 몇 달의 시간이 통째로 떠오른다
중학교를 서울로 다니게 되었고 그렇게 기숙사 단체 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서러웠던 그런 시골 아이였다 글쓰기는 먼 곳에 존재가 의식 안으로 건너올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글쓰기는 먼 곳의 시간과 장소를 그 안의 가득할 공기를 실어 날라 준다. 글쓰기는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단발머리 여학생의 얼굴 표정과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도 싱싱하게 날라 준다.
글쓰기는 먼 곳의 있는 것들을 불러온다 먼 곳의 소리와 먼 곳의 향기와 먼 곳의 풍경과 먼 곳의 대화를 너와 나의 공간을 그대로 붙들어 가져온다
쓰다 보면 알아가는 것들이 있다
그중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관계 다
타인과의 거리다 나의 존재를 신호등처럼 알려주는 건 타인과의 거리다 다가섬과 물러섬의 이치다 그래야만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있지 않을까!!
그건 생존의 본능이었다
내가 서있는 곳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면 타인이 서있는 곳의 위치 또한 알아야 한다 공간의 거리를 알아야 다가설 수도 물러설 수도 있다 그래야만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고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그걸 아는 자만이 내게로 불어오는 바람이 순풍인지 역풍인지를 가늠할 수가 있다 삶의 순간순간 만나는 바람은 수없이 많다 모든 바람이 나를 끊어 닿기지만은 않는다 어떤 바람은 밀어낼 수도 있을 터이고 어떤 바람은 그 속에 휩쓸려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터이다
자기 존재를 붙들고 삶이 만들어주는 지금을 만끽하며 한없이 맑은 생(生)을 살다 가려면ᆢ적어도 우리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었다
글쓰기는 우리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 줄 것이다 글쓰기는 취하고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서 알려줄 것이다 글쓰기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글쓰기란 그러할 것이다
오늘 밤도 글이 찾아와 새벽잠을 깨워 주기를 ᆢ
- 순풍이 불어오는가?
아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자만이 어떤 바람이 적당하고 어떤 바람이 자신의 순풍인지를 안다 무엇이 내게 아직도 남아 있는가
" P 480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