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술잔을 기울이며 나눈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적어 볼까 한다. 그날 오후도 더위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땅을 달구고 있었다. 시원하면서도 맛이 좋은 술 먹은 만한 곳을 찾다가 고른 곳이 아파트 상가에 붙어 있는 작은 맥줏집이었다. 오후 5시 인데도 더위는 대 낮처럼 뜨거웠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가 불쑥, 좀 더 정확히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툭툭 끄집어내듯 말을 이어 나갔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죽었어요."
그는 마치 며칠 전에 일어난 일처럼, 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한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건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기 속에 있는 그리운 사람을 잃지 않으려 말을 하게 되는 경우와 비슷할 거라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이야기를 만나는 누구에게나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소가 소박한 동네 맥주집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가게 주인의 음식 솜씨가 소주를 기울이기에 더없이 좋지 않았더라면, 한 여름 예보에도 없는 굵은 빗줄기가 한 시간 넘게 쏟아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엄마가 때때로 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큼 기분이 닿았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참이슬 소주병이 테이블에 일열로 줄지어 세워져 갔다. 그 빈병들만큼 우리 속은 술로 채워져 갔지만, 이상하리 만치 소주는 먹을 때 취기가 올라오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오늘이 그런 자리였던 것 같았다. 물론 다음날 일어나지도 못한 채 회사에 전화를 걸어야만 했지만, 그의 사는 이야기는 그렇게 멈추지 않았고 나 역시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건 마치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마냥 사람을 몰입하게 만들어 주었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다 보면 읽는 것과 보는 것의 그 묘한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가 찾아온다. 무너진 경계 속으로 이야기와 내가 뒤섞여 언어가 질감으로 느껴져 가게 된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고 난 후 따라 죽으려고 했어요. 사는 게 의미가 없어지더 라구요. 심한 공황장애가 왔어요."
무척이나 효자였던 그는 엄마가 부를 때마다 달려갔다. 엄마는 시간이 갈수록 아들에게 의지했다. 마치 엄마와 아들이 바뀐 것처럼 두 모자는 그렇게 지쳐갔다. 그렇게 지쳐 갈 때쯤 아들은 엄마를 양로원으로 보냈다. 양로원으로 보내고 몇 주가 안 돼 엄마는 심근경색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남겨진 아들은 감당해야 될 죄책감이 공황장애로 이어져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아내도 힘든 시기였다. 그 시기를 이겨 낼 수 있었던 건 지나고 보면 성당으로 날 불러주신 하느님이었다며 아내는 이야기했다.
그는 이미 지나간 시간 속의 자기 모습을 스케치하듯 이야기해 나갔다.
지금 으로만 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는 가정적이며 헌신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묘한 흡입력이 있다. 나는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을 할 때 머리를 조금 좌우로 흔들며 이야기하는 그의 버릇도 눈에 들어왔다. 때론 사람은 마주 앉은 사람과 똑같은 몸짓을 할 때가 있는데 나도 모르게 좌우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버릇이 옮은 것이다.
나는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정확히는 기억에 없지만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엉켜 가며 그렇게 기분 좋은 술자리가 끝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