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재미있는 일중에 하나다. 그렇다고 소확행 까지는 아니지만 자주 시간을 내서 혹은 자투리 시간에 사람구경을 하는 편이다. 그런 장소는 구별이 없어서 신호등 앞이라든가, 차도와 인도가 일 차선으로 붙어 있는 도로라든가, 한가한 재래시장이나 화요일 오전 백화점이라든가 제법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에서, 그래서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의 표정과 나이대와 옷감의 재질과 색상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단화와 구두 중 어느 것을 신었는지, 어깨에 맨 가방은 명품인지, 에코백인지, 그래서 그 가방 안에 삐죽이 튀어나온 것이 소설책인지, 그냥 전단지 인지, 아니면 잡지책인지를 눈여겨보게 된다. 그걸로 그 사람이 적어도 어떤 사람인 지를 상상해 보게 되는데 그럴 때면 소설에서 읽었던 등장인물이나 혹은 내가 가끔 상상했던 인물들이 길거리에서 실제 만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특별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냥 생각 없이 지나칠 때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주변을 감싸게 되는데, 운이 좋을 때는 한 명 한 명 그날 스쳐간 사람들이 캐릭터처럼 선명하게 남기도 한다.
9월 말, 밖은 여전히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길고 무더운 날씨에 사람들은 점점 휴양지에서나 볼 수 있는 편한 옷차림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이상하다거나 시선을 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날도 난 집 앞 사거리 신호에 걸려 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항상 같은 지점에서 신호에 걸린다. 피해 갈 수가 없다. 잘 생각해 보면 운 좋겠도 직진신호에 획하고 지나갈 때도 있었지만, 해마는 그런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이상한 것은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앞에 서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그날도 유독 눈에 띄는 한 분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 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는 빅아일랜드 해변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얇은 나시티를 입고 근사하게 서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냥 수영복에 가까웠다.
왜 수영복을 입고 시내 한복판 사거리를 서성이는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보는 순간 무더위가 없어지는 듯했다. 시원해 보였다. 마치 하와이 해변을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산책하는 원주민처럼,
때마침 신호등이 바뀌었고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는 천천히 런어웨이 하듯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까만 선글라스, 한 갈래로 묶은 길지 않은 단발머리, 이국적인 외모 알맞게 구릿빛으로 타들어간 갈색피부, 짧은 반바지 하얀 스니커즈 운동화, 왼쪽 어깨에 걸쳐 있는 구찌 핸드백, 마치 신분증처럼 걸쳐 있는,
때론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 사람들이 있다.
방금 전에 내 앞으로 지나간 그 여자는 한여름 보다 무더운 9월의 무더위를 빅아일랜드 해변으로 만들어 주었다. 순식간에 바다 향기가 밀려왔고 뜨거운 아지랑이는 포근한 햇볕 냄새로 느껴졌다.
방금 신호가 바뀌었고 나시티를 입은 그 여자는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수영복을 입은 그 여자가 생각이 났다. 무더위를 10도 정도는 낮춰 주었던 묘한 능력을 가진 근사한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