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그 해 여름
1994년 여름은 무더웠다.
그 해 여름이 오기전 5월24일 난 군복을 벗었다. 만기 제대 였다.
스물세살, 세상을 알기엔 이른 나이였다. 혈기만 가득할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무엇을 해야 되는지, 23살 청년은 알수 없었다. 우선은 돈이 없었다. 군대까지 갔다 왔는데 용돈 달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막내 외삼촌은 미장 기술자 였다. 막내 외삼촌을 따라 다니며 노가다 일을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덮은 뿌연 먼지와 숨막힐 정도로 끓어 오르던 습한 더위속에 선풍기 한대 없는 공사장 막사에서 한댓잠을 잤다. 일이 얼마나 고되던지 온몸에 덕지 덕지 붙어있던 시멘트 먼지를 씻어내기가 무섭게 판자로 이어 붙힌 막사 한켠에서 쉽게 눈이 감겼다.막사 뒤쪽으론 인부들 밥을 대주던 함바집이 있었고 하루 세끼 식사를 고봉밭으로 식판에 얻어서 먹었다. 몸을 부려 먹던 밥은 달고 맛있었다. 함바집 사장님은 앳떼 보이는 나에게 몇살 이냐 됐냐며, 무슨일을 하냐며, 고향은 어디냐며, 반찬 더 갔다 먹으라며 갈때 마다 말을 붙히셨다.
아파트 공사장 주변으론 또 다른 아파트들이 올라가고 있었고, 공사장을 드나드는 시멘트를 담은 레미콘 차량들의 소음과 인부들이 욕설들은 하나의 풍경처럼 같은 모습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글 이글 아지랭이가 타올랐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있는듯 했다. 주변으로 보이는거라곤 시멘트와 아파트 주변을 감싼 철재 아시봉과 그속에 매달려 하루 일당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인부들 뿐이였다.
중복쯤 되었을까 더위는 꺼질줄 모르고 흙길위에 뿌려대던 물줄기는 뿌연 먼지를 잡아주지 못한체 공기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때쯤 이였다. 비상 싸이렌이 울렸다. 북한 김일성이 죽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제대한지 몇달 안된 나는 다시 끌려 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함바집 사장님도 밥을 먹던 내게 국방부에서 연락 안왔냐며 이야기했다. 아마 며칠은 군복을 다시 입게 될까 걱정하며 보냈던 기억이 난다. 며칠 사이에도 옆동의 아파트들은 대밭 죽순 솓아나듯 쑥쑥 올라갔다. 어느새 저리 올렸을까 일하는 인부들 조차 아파트 공사 속도에 신기해 했다. 15층 정도되는 아파트들이 대부분 이였는데 그 정도 높이에서 밖을 내다보며 태우던 담배 한개피의 맛이란 이 보다 더 좋을수 있을까 그런 기분이였다. 방이 5개가 넘는 대형평수를 미장하자면 한달 넘게 걸리는 일거리였다. 거실이 얼마나 넓던지 쉬는 시간에 족구를 했던 기억도 난다. 언제 이런곳에 살아볼까 모두들 같은 넉두리를 해가며 벽면에 시멘트를 바르는 인부들은 남의집만 쎄빠지게 바르고 있다며 이야기 했다. 시멘트 한푸대의 무게는 40kg가 넘었다. 시멘트 두포대씩 어깨에 둘러메고 하역작업을 하는분들을 쳐다본다. 마치 기계처럼 아무 표정없이 단련된듯 일을 한다.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한포대도 간신히 져매는 나로써는 엄두가 나지 않은 일이다. 어디 그뿐이랴 벽돌을 져 나르는분들의 기예는 가히 서커스를 보는듯 하다. 지게발 위에 빼곡히 쌓아올린 벽돌더미를 곡소리 없이 한번에 지껴올려 낮은층으로 실어나른다. 높은층은 그대로 어깨에 질머진채 외곽에 설치된 노란 승강기 안으로 들어간다. 바벨탑을 쌓는 노예들 처럼 힘듦을 잊은듯 땀을 닦아가며 일한다. 아파트 외곽으로 아시봉을 연결해주는 목수들을 본적이 있다. 원숭이 처럼 허리줄에 묶어둔 얇은 생명줄 하나에 의지한채 그 높은곳에 매달려 한손으로 철봉을 잡고 어어나간다. 무게도 재법 나가는 아시봉을 마치 젓가락 잡듯 수월하게 다룬다. 진기명기가 따로 없다. 그런일에 비하자면 내가 하는일은 그야말로 잡일이다. 누구나 사지육신 멀쩡하면 기술없이도 되는 일이였다. 우선 모래를 가는채로 고른다. 이일을 하자면 팔뚝과 다리 근육에 심각한 근손상이 가해진다. 이를 참고 해나가다 보면 근손상은 그대로 근육으로 변해간다. 높게 쌓여 있던 거친 모래가 채로 걸러져 고운모래가 된다. 이때부터 본견적인 고된일이 시작된다. 모래와 시멘트를 미장을 해야되는 층으로 옮겨야 한다. 두발 니어카에 모래를 실어 담는다. 모래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적당히 실지 않으면 실어 나르다 자빠지기 일쑤다. 일이 거칠고 힘들다보니 몇번 니어카가 업어지고 나면 울고 싶어진다. 요령이 필요했고 며칠 하다보니 필요한 잔기술들이 몸에 붙기 시작했다. 모래는 적당히, 부릴수 있는만큼만, 조금씩 여러번 가진힘을 효율적으로 끌어 쓰려다 보니 나름의 방법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일에 힘이 필요했다. 시멘트 한푸대는 아무리 용을 써도 힘에 부치는 무게였다. 손가락 마디 마디가 시멘트에 진이겨져 벗겨지고 물이 잡혔다.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터지고 딱지지고 딱딱해져 굳은살이 잡혀 나갔다. 사는게 그렇듯 상처가 아물어 가며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다. 거친일에 대한 보답인듯 했다. 시멘트와 모래는 물과 완벽한 비율로 섞여야만 적당한 점도를 지닌 찱흙 처럼 벽에 착착 달라 붙는다. 외삼춘은 시멘트 한푸대에 모래는 이만큼 넣어서 섞으라며 시범을 보여주었다. 시멘트 색깔과 모래 색깔이 섞여서 우러 나오는 딱 좋은 색상이 있는듯 했다. 이 역시 하다보니 눈감고도 색상만 보고도 시멘트가 부족한지 모래가 부족한지를 구별할수가 있었다. 그렇게 잘 섞여 비벼진 찱흙처럼 알맞은 점도의 시멘트를 통에 담아 사다리 위로 올려줘야 된다. 물까지 더해진 시멘트는 한없이 무거웠다. 온몸이 욱신거리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때 하루 일당은 오만원 이였다. 군대 병장때 받던 월급의 다섯배가 넘는 돈이였다.
고된 하루를 버티게 해주었던건 일당이였다. 일한날은 달력에 빨간게 동그라미를 쳐나갔다. 흙먼지 시멘트가루 뜨거운 무더위 한댓잠을 버티게 해준건 빨간 동그라미 들이였다. 한달 꼬박 일을 해도 150만원 이였지만 스물세살 나에게는 큰돈이였다. 그해 돈벌이는 이후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든듣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힘든일도 해봤는데 뭐든 할수 있을것 같았다. 몸은 상처 투성이였지만 마음만은 단단해져갔다.
품삯은 학비와 생활비 수준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1994년 스물셋 청년은 인생의 고됨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가끔 지인분들과 식사자리에서 일산신도시는 내가 지었다고 농담을 한다. 이후로 살아가면서 일산 호수공원을 가거나 킨텍스를 가거나 외곽순환도로로 스치고 지나갈때 마다 그해 무더웠던 여름, 일산신도시 어느 아파트가 생각이 난다.
내가 서 있던 아파트 공사 현장의 그 풍경이 마치 오래된 화풍의 그림처럼 내 마음밭에 걸려 있다.
일산신도시가 재건축 심의를 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뉴스를 들으니 그때 흘렸던 땀냄새가 저며 오는듯 했다. 그때 15층 아파트에서 내게 불어오던, 무덥던 더위를 식혀주던 그 고마운 바람이 가끔 내게 불어온다.
그 바람을 맞으며 마종기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마종기 -바람의 말- 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