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사호선과 이호선의 갈아타는 역이라서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난 문옆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바로 앞에 서있던 여자가 가방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냈다. 그러니까 문제는 여기서부터인데 손도 제대로 움직일수 없는 공간이었는데 여자는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것도 바로 내 앞에서, 파우더 분가루를 날리며, 얼굴에 퍽퍽 파우더를 토닥거렸다. 파우더 분가루가 얼굴에 묻을 때 나는 묘한 둔탁한 소리가 사분의 사박자로 바쁘게 울려왔다. 민첩하고 물 샐 틈 없는 손놀림으로 꽤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할 정도도 됐는데 딱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여자는 까치발을 내리고 다시 가방을 뒤척였다.
바로 내 앞은 그냥 서있는 간격이 여유가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머릿결이 닿을 정도였다. 숨소리까지 들렸다. 그만큼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자는 손을 위로 올리더니 까치발을 해서 자기 얼굴을 문 앞 유리창에 비추었다. 파우더의 작은 거울로 보는 게 힘들었던지, 아니면 얼굴의 각도가 안 맞아서 일수도 있다. 나는 너무 가까이에서 화장을 하는 여자가 조금 민망해서 숨도 쉬지 못했다. 아마도 내 앞에서 그렇게 편안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하는 여자를 옆에 서있는 아줌마는 우리를 아는 사이나 부부관계로 생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얼굴 화장을 끝내더니 립스틱을 꺼냈다. 입술주위로 선명한 원색이 그려졌다. 순간 어떤 말이라도 걸고 싶어졌다. 나는 설마 눈화장은 안 하겠지 속으로 생각을 했다. 눈화장만큼은 아무리 기술이 좋다 해도 승객들로 꽉 들어찬 이런 데서 할 수는 없을 거야! 여기서 책을 내리면 여자의 얼굴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돼있어서 난 슬쩍슬쩍 헛기침을 하며 여자를 밑에 부분만 쳐다보았다. 물 빠진 하늘색 청바지에 검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단발머리 귀뒤로 머리를 쓸어 올려서 긴 목선이 보였다. 까만 구두 위로 청바지가 보기 좋게 걸쳐 있었다.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샴푸내음인지 향수냄새인지 향기가 났다. 여자는 그렇게 앞뒤 사람으로 붐비는 이호선 지하철 안에서 힘 안 들이고 화장을 했다. 마치 신부 화장 하듯이,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어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그 순간 다음역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자의 왼쪽 팔꿈치가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난 완벽한 여자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을 내리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키가 제법 커 보였고 어깨도 넓어 보였다. 뒷모습만 봐서는 미인축에는 들지 않아 보였다. 지하철 문이 열렸다. 화장을 끝낸 여자는 자신 있게 걸어 나갔다. 그냥 내 눈엔 자신 있어 보였다. 누군가를 만나려는 듯 사람들을 비집고 멀어 저 갔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어져 가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지금까지 쳐다보지 못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그리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지하철 안은 다시 사람들로 채워져 가기 시작했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화장하는 여자를 만나기까지 우연이라면 우연일 듯한 일들을 적어 보자면 만약 내차가 고장이 안 났더라면, 고장이 났더라도 사이드미러 고장이 아니었다면, 수리 일정을 화요일 11시로 잡지 안았더라면, 전화 거느라고 세 번째 지하철을 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지하철 2호선의 다섯 번째 칸을 타지 않았더라면, 난 내 코앞에서 화장하는 여자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말이다.
나는 평소 수원이나 분당 수리센터에 차를 맡겼었는데(당연하다. 위치상 가깝다 보니) 사이드밀러 수리는 성수동지점에서만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차 막히는 동네를 찾아가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정비 기술자가 차를 점검해 보니 몇 시간 내로 고칠 수 없다며 차를 맡겨 두고 가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성수역 주변은 여기저기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가 들려왔다. 이상 하리만치 한국어는 들리지가 않았는데 노소 상관없이 모두 스마트폰에 푹 빠져 있었다.
잠깐 아내 차를 이야기해보면,
아내의 차는 혼다 CRV이다. 그리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아서 아내가 마음 들어하는 차다.
아내는 차를 깨끗이 쓰는 편이 아니다. 어느 정도 타다가 남 태우기 민망할 정도가 되면 나에게 세차 좀 해달라고 이야기한다. 마치 그건 너의 일인데 요즘은 왜 안 해주냐는 듯이, 너무 자연스럽게, 진작 알아서 제때 할 것이지, 모 이런 말은 안 했지만, 마치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정도의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
큰 고장 없이 십만 킬로가 넘긴 걸 보면 혼다 자동차는 품질이 좋은 것 같다. 미국시장에서 판매 실적이 좋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래도 십 년이 되다 보니 드디어 고장다운 고장이 났다. 그렇다고 운전하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이참에 소모품도 점검할 겸 서비스센터에 차를 맡겼다. 몇 주 전부터 운전석 쪽 사이드밀러가 고장이 나서 접히지가 않았다. 모가 대수냐 접혔는데 안 펴지면 문제일 수 있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차를 한 후 접히지 않는 운전석 쪽 사이드미러가 불편해 보였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유가 합쳐져서 난 화장하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그건 한 발치 떨어진 공간에서는 여러 번 봤던 흔한 장면 이었는데도...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이렇게 계속 그 여자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