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는 친한 친구는 일 년에 두어 번 한국에 나온다. 한 번은 혼자 들어오기도 하고 한 번은 가족과 함께 들어오기도 한다. 매년 우리는 친구가 들어오는 일정에 맞추어 여행을 함께 한다. 가족과 함께 하기도 하고 또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는 친구들보다 더 자주 보게 된다. 이번에도 친구는 10월 말이 돼서야 일주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우리는 만날 장소를 이야기하다가 동묘에서 보기로 하고 동묘를 검색해 보았다. 임진왜란과 명나라 그리고 관우상 주변 구제시장과 청계천 여러 관련 검색어들이 올라왔다. 마우스로 클릭해 가며 큰 글씨만 훑어 보았다.
힘들게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친구와 동묘 안으로 들어갔다. 동묘 주변은 마치 탑골공원으로 모여드는 늙수그레한 어르신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히잡으로 얼굴을 가린 외국인들이 보물을 찾듯이 가판 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뒤척이고 있었다. 골목 사이로 들어왔을 뿐인데 동묘 골목상가의 시간은 90년대를 생각나게 할 만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동묘 안으로 들어서자 꽤 널찍한 마당 한가운데 기와지붕을 멋지게 이고 있는 목조 사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넓은 마당 주변으로 몇 그루의 나무들이 심겨 있었고 담장 너머로 높이 솟은 아파트들이 가을 햇살을 막아서고 있었다. 구제시장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옷가지에서 곰팡 네가 피어났다. 킁킁 거리며 길거리에 걸려있는 청바지와 겨울옷들을 구경하며 걸어갔다. 청바지를 사려는 건지 히잡으로 머리를 가린 외국인들이 흥정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없는 게 없는 도깨비시장은 오래전에 없어진 쓸모없는 물건들을 가지런하게 쌓아 올려 그것을 필요로 할 귀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투벅 투벅 걸으며 시간여행을 하기엔 이보다 더 좋은 데는 없을 것 같았다. 한 손엔 아메리카노를 들고 어깨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가을 햇살을 느끼며 청계천으로 들어섰다. 청계천 산책로 안으로 들어오니 거리상으로 몇 발자국 걸었을 뿐인데 방금 전 들려오던 차소리와 온갖 소음이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 앉아 있을 들려오던 소리들이다.
조용히 흐르는 맑은 물소리, 새들에 지저귀는 소리, 청둥오리들이 자맥질 치며 첨벙 거리는 소리, 산책하며 거니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가 만들어내는 바람소리, 가을햇살을 튕겨내는 물살 위로 반짝이는 윤슬, 청계 전 산책로 돌담 위에 앉아서 그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순간이 스쳐갈 때,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리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생각이 지워진 그 자리에 오롯이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이 존재한다. 아무 생각도, 아무 걱정도 없는, 한 없이 정적이기만 시간, 난 이런 시간을 사랑한다. 삶의 온기와 찰기를 느끼게 해주는 시간, 내가 살아 있구나! 심장이 뛰고 있구나!
청계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우리는 중고서점이 있는 평화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확히 삼십오 년 전 나는 중학교 삼 학년 때 옷을 사러 이곳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옷을 살만한 데가 별로 없었다. 흥정을 하다가 옷을 안 사고 돌아서면 상인들은 어리숙해 보이는 우리들을 윽박지르기도 했다. 세월에 덧깨가 몇 번은 흐른 시간,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던 거리를 한량처럼 거닐었다. 그리곤 불쑥 예정에도 없었던 쇼핑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후드티 두벌을 샀고 나도 후드티 두벌을 샀다. 부부 동반으로 입으면 좋을 것 같아서 충동구매를 했지만 곧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느라 서로 선물로 해주었다고 아내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친구나 나나 아내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이 비슷하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아내가 싫어하는 일 안 하기 정도인데 어찌 보면 어린 왕자처럼 길들여지는 과정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쇼핑을 끝내고 낙산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작년에도 왔봤던 곳이었는데 여기 만큼 경관이 좋은 데가 없어서 올해도 낙산공원을 찾았다. 천천히 산성 둘레 기를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난 시간을 가장 알차게 보내는 방법 중 하나는 걷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