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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의 암 투병기 8

엄마의 슬픔을 알게 되기까지

by 둥이


장인어른의 병환을 들은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 안에 묻고 싶은 많은 말들이 들어 있었다.


장인어른은 엄마에게 늘 건강해 보이던 바깥사돈이었다. 사돈들의 나이가 십 년씩은 젊어서 몇십 년은 더 사실 줄 알았다고 했다. 동생네 사돈어른이 돌아가신 지 체 한 달이 안된 시간이었다. 두 사돈이 그렇게 같은 시기에 닥친 병환으로 부모님은 힘들어했다. 엄마는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 말을 고르는 듯했다.


"이 나이가 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 자식 앞세우지 않고 죽는 게 복이라면 복이다"


"쌍둥이를 그렇게 예뻐해 주셨는데 쌍둥이들 어떡하니"


엄마는 장인어른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그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친손주들이 먼저 걱정이 드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아픈 사람도 있는데 손주들이 먼저 걱정 드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만큼 바깥사돈이 사랑으로 외손주들을 키워 주신걸 알고 있었다.


엄마는 장인어른의 병환을 듣고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 소식을 듣기 전에도 엄마는 가끔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외할머니는 내가 대학생 때 돌아가셨다. 나의 기억에는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엄마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들을수록 슬픈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간직하고 살아간다. 가슴속에 두툼한 사랑이야기를, 한 획 한 획 지워지지 않는 언어들로 쓰인 자기만의 소설을,


난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가 그때 느꼈던 슬픔을 생각했다. 어쩌면 수없이 여과되어 삼인칭으로 들리는 슬픔이어서 더 슬펐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가까운 엄마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느껴지는데 삼십 년이란 공간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 그 쓸쓸함과 공허함에 대해서, 그 알 수 없음에 대해서,


외할머니는 오래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몇 달을 기침이 떨어지 않는 장모님이 걱정된 아버지가 어느 날 엄마에게 장모님 모시고 병원을 다녀오라고 한건 고추가 익어가는 칠월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폐암말기 진단을 받았다. 엄마는, 엄마의 암소식을 알고 농번기의 손가야 하는 많은 작물들을 내버려 둔 체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뛰어다녔다. 뻘겋게 익어가는 고추들을 한참 따야 하는 시기였다. 그때는 엄마에게 일 년 중 가장 바쁘고 소중한 시기였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알아본 요양원에 들어가 육 개월 정도 있었다고 했다. 요양원 식단은 외할머니 입맛에 맞지 않았다. 서해 바닷가가 고향이었던 외할머니는 젓갈처럼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엄마는 요양원에서 두 달 정도를 간병하다가 할머니 복수가 가라앉고 병세가 안정되는 시점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외할머니는 같은 요양원에 있던 할머니가 퇴원한다고 하자 자기를 수원에 내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어느 날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는 요양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드시고 싶었던 젓갈과 찌개를 손수 지어 드셨다고 했다. 맏딸 이었던 엄마 곁에 사셨던 외할머니는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지셨고 임종 전에 큰외삼촌이 모시고 갔다고 했다. 그렇게 내 기억에 인정 많고 손주들을 사랑해 주었던 외할머니는 큰 외삼촌댁에서 돌아가셨다. 그때가 긴 여름이 끝나가는 8월 말이었다.


엄마와 외삼촌들은 할머니의 유골을

뿌렸다. 외삼촌은 화장터를 출발한 버스를 어느 야산 앞에서 세웠다. 다시 찾아올 수 없는 곳을 고르기라도 한 걸까! 햇볕조차 잘 들지 않는 얕은 야산이었다.


외삼촌은 유골함을 들고 산으로 들어갔다. 외삼촌은 손주들에게 한 줌씩 뿌리라고 했다. 난 그 말을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의 뼛가루를 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다. 작은 단지 안에 하얀 뼈가루는 따뜻했고 밀가루처럼 희고 고왔다.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다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소나무 둘레로 뿌려진 가루가 마치 오월 송이가루처럼 바람에 날려가는 흐릿한 장면들만 남아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난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다.


엄마는 할머니의 유골을 뿌리고 돌아온 날,

수확할 시기가 지나 땅으로 툭툭 떨어지는 고추를 따러갔다.

고추밭으로 들어가 고추를 따려고 할 때 할머니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 순간 슬픔은 쓰나미처럼 엄마를 덮쳐 왔다. 엄마 키보다 커진 고추 고랑 사이에 숨어 소리 내어 울었다고 했다. 고랑 끝에서 마치 할머니가 같이 고추를 따고 있는 듯 보여서, 엄마, 엄마하고 울었다고 했다.


그날 고추 고랑마다 수십 마리의 잠자리가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고, 아직도 따야 할 빨간 고추들이 고춧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더운 바람이 불어와 고춧대를 흔들고 있었고, 하늘은 이런 걸 아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은 흐르고 있었고, 저 혼자 푸르기만 한 저 하늘을 보고 해 질 녘까지 울기만 했던,


엄마를 떠나보낸 엄마가 느꼈을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엄마 곁에서 난 슬픔을 느꼈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그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때 난 스물한 살이었고, 서울 휘경동 경희대 앞에서 친구들과 만나 술을 먹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엄마의 슬픔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슬픔도 선명하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슬픔은 오롯이 엄마의 슬픔이었다.


"슬픔은 어느 죽음까지 슬플까!"라는 생각이 삼십 년이 지난 지금, 그때 느껴지지 않았던 슬픔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오기 시작했다.


슬픔은 참 이상하게도 오랜 시간이 지난 도 그 밀도와 순도는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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