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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의 암 투병기 9

항암 이차 이야기

by 둥이

장인어른의 암 투병기 9


새벽녘이 되자 날씨는 급격하게 추워졌다.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가 넘는 듯했다.

장인어른의 채혈검사가 오전 7시 58분이었다. 장인어른을 모시고 이차 항암을 받으러 가는 날은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다. 일요일 항공박물관을 다녀온 후 아내와 아이들이 독감에 걸렸다. 그것도 이차항암을 받기로 한 전날에,


아내는 급히 나를 아이들 방으로 격리시켰다. 체온을 재보니 다행히 36.5도였다. 기침도 없었고 열도 없었다. 거실에서 아이들과 아내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은 39도가 넘는 고열과 기침으로 힘들어하다가도 해열제만 먹으면 37.5도로 내려왔다. 아이들은 열이 떨어지면 온방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난 아이들을 피해 이방 저 방으로 옮겨 다녔다.


"자기가 가야 될 것 같아"


아내는 입원을 할지 모른다며 짐을 챙겨 주었다.


"아빠한테 사위가 간다고 부담 갖지 말라고 했어 오빠가 잘해드려."


"잔소리하는 딸보다 사위가 편할 거야 "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위가 마냥 편하지만도 않았을 터, 장인어른은 어색한 미소로 반겨 주셨다. 숨겨지지 못한 감정이 미소에 묻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보여줘야 되는지를, 말에서, 표정에서, 행동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채혈검사가 나오는 시간이 되자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


"간수치와 염증수치가 놀랍도록 좋아지셨어요 모든 수치가 양호합니다."


담당의사는 코에 걸쳐 있는 안경을 반복적으로 쓸어 올리며 검사수치를 설명해 주었다. 급격하게 퍼져가던 암세포가 항암으로 잡혀가고 있다고 했다. 의사의 언어는 암환자에게 그 어떤 약보다 강력한 치료효과가 있었다. 마치 잘 해내고 있다는 칭찬이 암세포를 잡아주는 듯했다.


장인어른은 조금씩 항암에 익숙해져 갔다. 영양제 맞듯 편안하게, 항암은 일상이 되어갔다. 톡톡 혈관으로 스며드는 항암제와 여러 수액들이 혈류 속에 퍼져갔다. 저 좁은 푸른 정맥 안으로 저렇게 많은 수액이 들어가는 걸 볼 때마다, 난 살아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혈관으로 빨려 들려간 항암제는 암세포를 찾아 죽일 것이다.


장인어른의 팔등위에 두 개의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고, 주삿바늘은 두 개의 긴 줄로 연결되어 다섯 개의 수액이 순서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시간에 맞춰 수액들은 교체되었다. 장인어른은 시간마다 수액들이 걸려있는 링거봉을 밀고 화장실을 갔다. 암병동 주변으론 장인어른처럼 링거봉을 밀며 수액을 맞는 환자들이 많았다. 한두 번 하다 보면 항암은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거라며 이야기했던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수액들을 줄줄이 달고 로비 커피숍에 있는 환자들도 있었고 병원밖 약국에 다녀오는 환자들도 있었고, 그냥 주사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음악을 듣으며 수액을 맞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달랐다.

슬픔을 토해내는 사람도 있었고,

슬픔을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고 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암병동을 드나드는 게 익숙해져 갔다. 사람의 감정은 바뀔 수 없는 현실에 차갑게 길들여진다.


암병동 진료실 의자에 앉아 진료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가 보아도 병환이 깊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내 옆에 앉았다. 노랗다 못해 검게 보이는 피부빛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할아버지의 링거대위로 여러 수액들이 달려있었다. 할아버지는 세상 구경을 하듯, 암병동의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라도 해야 되는 것 같았다. 자기 같은 사람이 많구나 위로라도 필요했던 걸까! 순간 복도 끝으로 걸어가던 외과의사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왔다. 장인어른 첫 진료를 해주었던 교수님이었다.


"수술하신 곳은 어떠셔요."

"항암 잘 받으세요 수술은 잘 됐어요."


젊은 의사는 부드러운 눈길로 환자의 낯빛을 천천히 살폈다. 할아버지는 의사 앞으로 바짝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자기의 말이 온전히 의사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듯, 눈빛과 행동에 예리함이 번쩍였다. 들리지 않는 대화가 몇 마디 이어졌다. 장인어른의 시선이 할아버지에 멈춰서 있었다. 자기보다 더 아파 보이는 사람들을 안타까운 듯 쳐다보았다.


장인어른은 항암을 시작한 후 자주 화장실을 찾았다. 항암 부작용은 아니지만 혈얙종양내과 담당의사는 오전진료로 비뇨기과를 연결해 주었다. 항암제와 수액이 들어가는 시간대에 맞추어 일층 비뇨기과로 내려갔다. 링거봉에 걸려있는 항암제와 수액들이 한 방울 한 방울 느리지 않은 속도로 혈관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비뇨기과 의사는 전립선비대증 증상은 없다고, 그러니 물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나이에 비해 전립선이 정상이라고 했다. 장인어른은 의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시선은 항암제가 제대로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일차항암 때처럼 큰 부작용은 없었다. 울렁거리지도 않았고 어지럽지도 않았다. 링거 맞듯이, 편안히 항암을 맞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혈액내과 담당의사가 환자의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게끔 하겠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다. 완전한 치유가 불가능했기에 환자의 남은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끔, 항암제 투입량을 반으로 줄여 부작용을 최소화시킨,,, 장인어른의 일상은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벼락처럼 찾아온다는 통증은 내려놓기로 했다.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은 미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바로 이 순간만 생각하기로 했다.


따르릉

핸드폰이 울린다.


장인어른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편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잔물결 일듯 하루의 일상이 녹아있는 그 목소리 안에 따뜻한 웃음과 정겨운 표정과 건강한 몸짓이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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