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처음부터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울고 있는 자식들과 아내 앞에서 울 수 없었는지 모른다. 환자의 통증보다 자식들의 고통이 먼저 생각났는지 모른다.
장인어른은 네 번째 항암을 맞은 후
이제는 편안하게 가고 싶다고 했다. 그게 마치 원하면 편안하게 갈 수 있는 병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장인어른은 이주에 한 번씩 항암제를 맞았다.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장인어른은 조금씩 힘들어했다. 항암제 약효가 약해지는 이주차가 되면 조금씩 복통이 찾아왔다. 복통은 진통제로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려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항암제의 강한 독성은 조금씩 체력을 갉아먹었다. 장인어른은 잘 먹어야 버틸 수 있었기에 억지로라도 먹었다. 먹는다는 게 점점 고통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기 위해 밥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큰처남과 아내는 복어탕과 추어탕을 사다 날랐다. 장인어른이 한 끼 식사를 맛있게 먹는 날은 모두의 시름이 가라앉았다. 먹는 양이 줄다 보니 대변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살이 빠졌갔다. 살이 빠지는 것만큼, 삶의 의욕도 빠져나갔다. 계속 흔들렸고 계속 힘들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은 생각이 계속 마음을 흔들었다. 치료를 더 받는다는데 의미를 두지 못했다. 약해진 체력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장인어른은 아내에게 머리를 정리해달라고 했다. 한 달에 한번 가던 이발소도 못 갈 정도가 됐다. 장인어른은 몸도,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아내는 아빠의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잘라주었다. 그 많던 머리숱도 휑하니 빠졌다. 암세포는 가진 모든 걸 빼앗는다. 더 이상 가져갈 게 없을 때까지,
1월 7일 장인어른은 네 번째 항암을 받았다.
항암 담당의사는 이 주 후에 패트씨티를 찍어보자고 했다.
피검사 수치가 좋다고 했다.
보통 때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들이 혈관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영양제와 비타민 항암제가 번갈아가며 들어갔다. 항암치료는 이제 평범한 일상이 되어갔다. 장인어른의 체력은 항암부작용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담담 의사는 장인어른을 볼 때마다 칭찬을 했다.
마치 그 칭찬이 항암제라도 되는 것처럼,
장인어른은 딸자식과 아내 앞에서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이렇게 먹지도 못하면서 삶을 연명한다는 게 의미가 없다고 했다. 딸자식과 아들자식들한테 넘치게 받았다고 했다. 그 정도면 슬프지 않게 갈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됐다. 이제 가도 된다. 그만하자."
장인어른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흘리지 않던 눈물을, 두 달이 지난, 네 번의 항암이 끝난 후, 아내와 장모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오늘은 울고 싶다. 오늘만 울게!"
딸자식과 아내 앞에서 장인어른은 소리 내어 울었다. 흔들리는 어깨, 울음 짓는 목울대, 장인어른은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 그냥 그림자만 보였을 뿐인데, 이제 곧 사라질 것처럼, 이제 곧 꺼질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