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제를 바꾸다.
슬픈 일이지만 항암제는 암세포의 증식을 막지 못했다. 그사이 암세포는 더 커져 있었고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작아지길 바라서였을까, 그 순간 진료실 안은 짙은 침묵이 깊게 파고들었다.
담당의사는 항암제를 바꾸어야 된다고 했다. 아내와 처남의 목소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인어른은 담당의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짧게 이야기했다.
"그만 받고 싶습니다."
항암제를 바꿔서 다시 시작해보자는 담당의사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담당의사도 항암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가오는 통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느 순간 황달이 올 것이고 배에 복수가 차오를 것이고 그리고 심한 고열과 복통이 온다고 했다. 그렇게 통증이 어느 순간 벼락처럼 찾아온다고 했다. 그땐 이미 인지 능력이 남아 있지 않아서 연명 치료를 할 건지 결정해 달라고 했다. 장인어른은 연명치료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냥 그때가 되면 통증 없이 보내 달라고 했다. 담당의사는 알겠다며 여기에 이름을 적어 달라고 했다.
담당의사는 항암제의 약효가 더 강한 걸로 바꾸면, 지금까지 받았던 것보다 항암부작용이 더 커질 거라고 말했다.
아내와 막내 처남은 장인어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이야기했다. 막내처남 옆에는 수능시험을 치른 손주도 같이 있었다. 장인어른의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갔다. 아들도 울고 딸도 울었다. 장인어른은 멈추지 않고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죽음이 이제 바로 앞까지 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항암을 받는다는 게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이때가 항암을 시작하고 가장 힘든 고비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건, 장인어른은 이때 항함을 포기하는게 좋다고 판단을 했다. 암이 커지는 속도가 항암제로 잡히지 않았다. 암의 증식 속도를 줄이려면 방법은 없었다. 장인어른은 암으로 인한 통증의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점점 다가오는 통증의 고통으로 벗어나게 해달라 의사에게 이야기 했다. 그랬다. 함암을 한다는건 이미 치료의 목적에서 비껴나 있었다. 죽음은 성큼성큼,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내는 늦은 시간 집에 왔다.
애내의 눈가는 퉁퉁 부어 있었다. 장인어른은 간병인이 있는 항암병동으로 배정되었다. 아빠 혼자 병원에 두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딸의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커다란 슬픔이 아내의 마음을 휘젓고 있었다. 그날밤 아내는 늦게까지 뒤척였다.
항암제가 오니바이트 항암제와 5FU로 바뀌었다.
장인어른은 다음날 항암제를 바꿔 다시 항암을 시작하였다. 바뀐 항암제가 독하다 보니 삼 일간 입원을 해서 항암을 받아야 했다. 똑똑똑 느리게 떨어지는 항암제가 혈관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어갔다. 10층 암병동은 넓고 깨끗했다. 장인어른의 표정은 밝았고 혈색도 좋았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장인어른을 정갈하게 보이게 해 주었다. 풍채가 좋은 장인어른은 간내담도암 말기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장인어른은 거울을 볼 때마다 당신 얼굴이 건강해 보여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죽음 앞에서라도, 당장은 아무런 통증이 없어서일까, 장인어른은 평온했고, 누릴 수 있는 일상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면서 항암을 받고 있었다.
나는 장인어른의 손을 꼭 잡았다. 푸른 정맥이 손등 위로 구불구불 올라와 있었다. 얼굴엔 드문드문 검버섯이 피어있었다. 장인어른은 사위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장인어른은 같은 병실에 누워있는 암환자들을 한 명 한 명 이야기했다.
바로 옆 침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말이 많다는 것과 맞은편 사람은 목소리가 크다는 것과 당신이 제일 나이가 많다는 것까지,
혹시나 대화가 끊기기라도 할까 봐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어제 애들만 아니었으면 항암을 안 받을 거라고, 이러고 지내다 그냥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장인어른은 편안해 보였다.
아내는 장인어른이 좋아하는 도토리묵을 길게 썰어왔다. 어머님이 만들어 준 양념간장을 도토리묵 위에 얹어 쓱쓱 비벼 드렸다. 장인어른은 도토리묵을 좋아했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이 밥 한 끼를 맛있게 드시는 걸 볼 때면 눈물이 났다.
장인어른은 도토리묵을 맛있게 드셨다. 그 순간 난 도토리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인어른이 좋아하는 도독이 묵을 오래도록 드셨으면 하는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