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겨울이 주는 선물 - 봄이 오면
봄은 겨울이 주는 선물,
겨울비가 조용히 내렸다.
멀리서 봄이 오고 있었다.
우리 곁으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계절은 마치 책장 넘기듯, 빠르고 섬세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봄이 오는 게 싫었다. 그 좋은 봄날의 햇살이, 따스히 부서지는 빛의 산란이, 땅 위로 돋아나는 여린 새싹들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행복하기만 한 봄날들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래서 아버님이 기다리는 봄이 오지 않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더디 오기를, 봄이 바빠 올해는 우리에게 들를 수 없게 되기를, 오늘이 계속되기를, 그래서 아버님이 기다리는 봄이 일 년 이년, 삼 년, 늦게 늦게 찾아오기를, 기도했다.
긴 겨울을 견뎌낸 초목의 잔뿌리와 다년생 화초들은, 어느 봄날을 기다려 움을 튀운다. 겨울은 긴 시간을 기다려 다음 계절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 봄은 겨울이 만들어준 선물이다. 그 안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소중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생명" 겨울은 봄에게 세상과 부딪껴 살아갈 "용기"를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을 심어 주고 사라진다.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1월 말, 그날은 설 명절이었다. 그날도 장인어른은 봄이 오면 그만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무슨 약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은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거실에서 윷놀이를 했다. 서툰 슬픔이 우리 쪽으로 옮겨 붙지 못하도록 더 과장된 몸짓과 흥분된 목소리를 내면서 윷놀이에 몰입했다. 그때 장인어른은 안방에 누워 있었다.
우리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TV소리처럼 들렸을까!
술자리를 좋아하는 장인어른의 빈자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장인어른은 다음 날 저녁, 의자를 밀고 우리들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평범한 일상을 나누는 이야기, 정치이야기, 몇 년 전 아들을 먼저 보낸 이모네 이야기, 특별할 것 없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술 한잔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싶었음을 알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진솔한 시간들을 좋아했다. 나눌 수 있는 술잔은 없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히 사랑이 느껴졌다.
봄은 성큼성큼 다가왔고, 장인어른의 몸은 급격하게 쇄약 해져 갔다.
가야 할 때를 아는 사람처럼 몸도 마음도 허약해져 갔다. 칼날을 알기라도 한 사람처럼, 암세포는 온몸으로 퍼저나 갔다.
장인어른은 어느 날 소변 색깔이 노래졌고, 열기운을 다시 느꼈다. 하루를 버티게 해 줄 최소량의 식사만 간신히 먹을 수 있었다. 그건 먹는 것보다는 위에 넣는 것에 가까웠다. 어머니가 식탁 위에 차려 놓은 밥 반공기가 반이상 남았다. 어느 날은 아예 수저도 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암세포는 숙주와의 동행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먹을 수 없는 고통은 남은 기력마저 빼앗아 간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시간을 버텨내는 것, 버텨 내야만 하는 것,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쉽게 받아 들일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또한 쉽게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기에, 기력이 쇄하는 그날까지, 장인어른의 남은 시간은 긴 시간을 버텨야 된다. 슬픔은 다른데 있지 않다. 그 고통의 시간은 전염병처럼 주위로 옮겨 붙는다. 우리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어느새 시간은 죽음을 익숙함으로 만들어 놓는다. 슬픔은 검은 그림자가 되어 우리를 따라다닌다. 지어지지 않는 문신처럼, 깊이깊이 파고 들어온다.
다행히 장인어른의 진료예정일이 열기운이 있는 날이었다. 피검사 수치를 들여다본 의사의 표정은 진지했고 손동작은 민첩했다. 담당의사는 마우스를 잡아당겨 화면을 키웠다. 오른손으로 검은 뿔테를 쓸어 올렸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잡념도 그녀를 방해하지 못했다.
"아주 위험한 상태입니다"
"항암제가 효과가 없네요."
"시급 한 건 담즙배액관을 연결해서 썩은 담즙을 빼내야 합니다."
황달증세가 보이기 바로 전단계, 장인어른의 진료일이 하루만 늦었어도 쇼크가 와서 응급실로 왔을 거라 했다. 우선 담즙배액관을 달고 황달수치를 정상화시킨 후에 다시 항암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의사는 차분했고, 보호자는 불안했다. 그것은 숙련된 장인처럼, 사람을 단련시킨다.
매년 기다리던 봄이었는데, 사라져 가는 겨울을 붙잡고 싶었다. 겨울이면 발목으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이 싫었다. 추운 겨울이 휙 가버리면, 장인어른이 겨울바람에 사라질 것 같았다. 희미한 촛불이 그 기운을 다해가고 있다.
계절이 바뀐 뒤에 라면 알 수 있을까
봄이 오면 봄은 알 수 있을까 겨울이 봄을 위해서 준비한 선물을, 봄이 오기까지 겨울이 견뎌야만 했던 시린 바람을, 바람이 나무에게, 나무가 우리에게 해준일들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어느 날 봄이 오면 장인어른은 겨울이 보내준 선물을 받을것이다. 그때라면 알 수 있을까 추운 겨울이 봄에게 선물을 주듯이 장인어른이 우리에게 보내준 선물을, 사랑을, 그 감사함을, 우리는 알 수 있을까!
각자의 슬픔은 분명 다 다를 것이다.
장인어른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서로를 사랑했던 아내는,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때론 남편 흉을 보기도 하고 때론 남편만 의지하며 긴 세월을 사셨던, 남편을 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슬픔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모든 기억은 순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은 시간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시간은 순간이 되어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 깜깜한 밤하늘에 별자리가 반짝이듯이, 장인어른은 우리의 기억 수많은 뇌하수체 속 그 깊은 곳 어딘가에 자리 잡아 영원히 반짝일 것이다.
난 사위로 써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장인어른이 보여주신 가장으로서 헌신과 사랑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 그리고 여유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