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로 들어가다.
죽음은 저녁처럼 찾아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곤 단순하게도 오직 "지금"이라는 하나의 순간뿐이다. 그 순간과 순간들이 길게 이어 붙여진 것들이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한다.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
<순수박물관 2, 34페이지> 오르한 파묵
그날 이후 저녁은 빨리 찾아왔고 하루는 빠르게 지나갔다.
장인어른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커져가는 통증으로 알아가고 있었다.
14층 병실 창밖으로 짙은 어둠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멀리 있는 산등성이 더 진한 어둠으로 짙어지며 저녁은 가까운 곳을 지우고, 먼 곳의 윤곽을 선명한 명암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둠은 암세포처럼 모든 색을 지우고 그 자리에 침묵만을 던져 놓았다. 저녁의 어둠은 마치 죽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인어른에게 저녁이 찾아오듯이,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눈가에 걸쳐 앉았다. 암세포는 뻘속으로 장인어른을 잡아당겼다. 항암제도 별 소용이 없었다.
사람이 먹지 못하면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장인어른이 암진단을 받은 지 세 달이 넘어가면서였다. 저녁이 오듯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장인어른은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어떤 감정일까! 지금 바라보고 있는 저 눈동자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죽음을 본 걸까! 죽음이 보이는 걸까!
"얼마나 기력이 빠져야 죽는 걸까"
장인어른은 아내에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뭐라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아내의 말과 이렇게 기력이 다해 죽겠구나 장인어른의 말이 갈길을 잃어 서로에게 와닿지 않았다.
장모님한테 전화가 걸려온 건 설을 보내고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장인어른은 독감이 온 듯 온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는 운전을 하면서 장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장인어른을 응급실로 들여보낸 후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아내에게 더 힘들었던 건, 계속 무너지고 약해져 가는 아빠의 마음이었다.
장인어른은 응급실에서 항생제와 해열제를 맞고 나서야 열이 떨어졌다. 코로나검사와 독감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다. 백혈구수치와 염증수치도 정상으로 나왔다. 응급실 담당의사는 열이 나는 원인이 항암제 부작용인 것 같다고 안심하라고 했다. 무엇을 안심해야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장인어른은 열이 떨어진 후 14층 병실로 입원했다. 10층 병실과 다르게 14층 병실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이 많았다. 상태만 봐서는 장인어른이 제일 괜찮아 보였다.
바로 옆 침대에는 육십세 여성분이 남편이 간호를 받고 있었다. 두 분의 관계가 부부라는 것을 모른 채로 그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 보호자는 남편이 아닌 아들로 보였을 정도로,
누워있는 암환자의 겉모습은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광대뼈만 보였고, 눈동자는 푹 꺼져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다 하기엔 너무 가혹한 모습이었다. 담당의사는 더 이상 처방해 줄게 없다며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보라고 했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호스피스 병원은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그 옆 침대에는 팔십 대 할아버지가 사위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장인어른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얼핏 봐도 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14층 병실의 환자들은 살이 빠져 광대뼈와 가죽만 남아 있는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분명 살아 있었지만 산자의 모습들이 아니었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통증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병실 안에서 장인어른은 가장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호자인 중년의 사위는 살뜰히 장인어른을 간호해 주었다. 유머감각도 좋아서 계속해서 장인어른에게 말을 붙였고,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도록 가족이야기와 정치야기를 혼자서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여 주었고 복도를 거닐 때도 부축을 해주었다. 그 사이 아들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들어와 우두커니 서있다가 말도 없이 가버렸다, 사위는 왜 아들한테 인사도 안 했냐며 장인어른한테 물어보았다. 사위가 아들보다 편한 걸까 사위의 간호를 받고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엔 표정이라고 할만한 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아내와 장인어른이, 사위인 내 생각을 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어쨌거나 저런 사위도 있구나 하며 비교를 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더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왜 불쑥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조금은 부럽기도 했을 거고, 조금은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저녁처럼 찾아온다. 그건 당연히 올게 오는 것이어서 어쩌면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깨어나지 않은 어둠 속에 눕게 된다. 죽음은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죽음이 있다는 그 사실만을 안다. 사실을 안다는 것이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기에, 죽음이 두려운 걸까! 무엇이든지 그게 무엇인지 모르면 두려워진다.
두려움은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이나, 햇볕이 닿지 않은 물속에서, 그 직접적인 원인 보다도 더 빨리 사람을 질식시킨다. 죽음 그 너머를 볼 수도 없고, 죽음 그 자체를 알 수도 없기에,
장인어른은 아내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해야 할 일들을 다했다고 했다. 그래서 원이 없다고 했다. 장인어른의 시간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들 속에 우리는 함께 있었고 매 순간 행복했다. 장인어른은 그만 항암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엔 닥쳐 올 무서운 통증이 더 빨리 찾아온다며, 아내는 울며 또 매달렸다.
죽어가는 사람은 그만 가고 싶다며 울었고,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며 울었다. 서로의 눈물이, 서로의 고통을 씻어주었다.
먼 훗날,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지나온 시간 속에 살아있는 순간들을 기억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금과 시간의 구분이 나의 삶 속에 녹아들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죽음, 그 알 수 없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