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면 특별히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손에 잡히는 데로 읽지는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잘 읽히는 책이 있고 며칠을 들고 있어도 몇 장 넘기기가 힘든 잘 읽히지 않는 책들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나를 낚아채는 어떤 문장, 어떤 글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부터 내가 존재해 있는 지금이라는 현재가 사라져 버린다. 그 짧은 순간 호흡이 사라지고 맥박이 멈춰 선다. 짧은 호흡 속에 이미지가 그려지고 주인공 곁에 바짝 붙어서 있는 나와 마주한다.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자아를 벗어버리는 순간,
몰입의 순간이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이런데 있다. 온전히 나를 묶어 놓을 수 있는 언어들, 과거와 미래의 시간으로 살아 날뛰는 나를 문장과 이야기로 칭칭 감아놓는다. 쉬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이틀, 일주일 지구의 자전주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소설 속의 언어는 한 획 한 획 자음과 모음이 되어, 날실과 씨실이 되어, 주춧돌과 디딤돌이 되어 단단하고 높은 성벽을 쌓아 올린다.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나만의 성이 스스로 쌓여 올려진다. 그곳에서 언희의 유희를 즐기고,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린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동네 도서관을 간다. 특별히 바쁘지 않은 주에는 거의 틈나는 대로 가기도 한다. 특히 주말 이른 아침, 도서관 주차장에 주차할 공간이 넉넉할 시간에 서둘러 주창장에 주차를 하고 1층 로비옆 커피숍에서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주문을 한다. 그리곤 도서관 앞 텅 빈 의자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이 시간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커피 향과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진한 숲향기를 큰 호흡으로 몸속으로 집어넣는다. 그것도 모자라 두 손을 하늘로 올렸다 기지개를 켜면서 우주의 온기운을 느껴본다. 그때 푸른 하늘은 끝없이 푸르르고, 숲향기 가득 담은 산바람이 불어오고, 따뜻한 가을햇살이 내게로 와 부서지는, 고요하기만 한 그 순간, 아무것도 필요치 않는 그 순간, 오롯이 시간을 밀도 있게 느낄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다.
난 이 시간을 좋아한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책냄새가 층층마다 쌓여 있는 곳에서 난 폴오스터의 소설과 무라카미하루키 소설을 읽는다.
무라카미하루키 소설은 잘 읽힌다. 긴 분량의 소설이라도 첫 장을 넘기고 두 번째 장을 넘기다 보면 소설 속으로 푹 빠져든다. 그렇게 쉽게 나란 존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의 소설은 뛰어난 상황 묘사와 지루하지 않은 스토리텔링이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무라카미하루키의 문체는 간결하고 디테일하다. 마치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어느새 주인공은 내 주변을 서성인다. 그러다 어느 날 말을 걸어온다. 대단한 질문이라곤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니다. 그때부터 사색이 시작된다. 수도 없는 질문이 쏟아진다.
"너라면! " " 나라면!"
" 넌 어떻게 할 거야 "
그사이 내 머릿속은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만들어진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시간의 궤적이 나의 시간과 겹쳐지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하고 상관없는 궤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마치 코페루니코스가 처음 발견한 태양 행성들의 궤적처럼, 어쩌면 벗어날 수 없는 로그함수의 수학공식처럼, 삶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걸, 논증과 반박으로, 타인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게 소설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삶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그들의 시간과 고통을 알게 해 주는 게, 그래서 타인을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소설인지 모른다.
폴오스카의 소설은 이러한 점에서 읽는 독자로 하여금 삶은 수만 번의 우연과 우연이 제멋대로 겹쳐지고 스쳐가는 알 수 없는 거라고 이야기해 준다. 폴오스카는 그의 작품 공중곡예사에서 수많은 우연과 어쩌면 필연 일지도 모르는 그런 우연들이 수도 없이 지나쳐가며 자신만의 삶을 그려나간다. 읽는 독자는 신의 뜻이 그들의 시간과 같이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우연이였을까를 두고 생각하게 한다.
무라카미하루키는 그의 소설 노르웨이숲에서 청춘의 사랑과 이별을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언어로 그려낸다. 무라카미하루키의 소설은 내 안에 잃어버린 순수한 감정을 찾아가게 해 준다.
그래서 삶은 충분히 아름다운 거라고 이야기한다.
소설은 소설로써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살아 숨 쉬며 읽는 사람들의 마음 밭에 씨를 뿌린다. 그 마음밭은 또 다른 소설과 또 다른 이야기로, 햇볕을 비추고 물을 주고 바람을 불게 해서, 마음밭은 비옥하게 만들어간다. 비옥해진 마음밭에서 사유는 스스로 진화하며, 잔뿌리를 내리고, 그렇게 울창한 나무가 되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부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