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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호구의 사랑 이야기

어느 호구 이야기 - 졸업식장 가는 길

by 둥이


사랑은 사람을 호구로 만든다.


창밖으로 하얗 게 얼어붙은 북한강이 보였다. 도로를 품고 흘러가는 강의 유형이 그대로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도로는 강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며 강허리를 따라 길게 이어졌다. 창문을 열기가 무섭게 시원한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멀리서 강물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강폭이 넓어지는 강하류엔 중간중간 얼지 않은 강물이 윤슬로 반짝였다. 양평에 가까워질수록 강폭은 좁아져 갔다. 강변으로 길쭉한 갈대들이 새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고, 강폭 너머 버들나무들이 길게 가지를 늘어 뜨린 채 겨울을 나고 있었다.


양평으로 가는 길,

강변에 펼쳐진 겨울 풍경이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곳에서 채원이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채원이는 나를 고모부라고 부르는 큰처남의 딸이다. 그냥 가족 관계에 묶여있는 고모부였다면, 아마도 다가서기가 쉽지 않아 많이 불편한 관계였을 테지만, 나에게는 좀 특별한 존재가 채원이다. 물론 이 특별함은 어디까지나 내가 조카들에게 느끼는 특별함일 뿐이다. 나의 특별함이 조카들의 특별함과 같을 수는 없다. 그건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 가진 감정의 특수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냥 원사이드러브라는 것인데, 사랑은 늘 권력욕이 있어서 한쪽의 사랑이 다른 한쪽의 사랑을 점유하여 그 사랑을 독점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한 사람의 사랑은 늘 사랑을 받는 상대방의 호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관계는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싹트게 되는데, 여인관계도 그렇고 자식과 부모관계도 그렇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그렇고 심지어 신과 피조물의 사랑도 한쪽의 사랑이 다른 한쪽의 사랑을 점유하여 다른 사랑을 길들인다. 어쩌면 사랑이란 감정은 스스로를 무장해제 시켜, 호구로써 부족함이 없도록 늘 원하는 모든 것들을 귀담아듣는다.


사랑은 사람을 호구로 만든다. 어찌 되었든 한 사람의 호구가 된다는 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언제까지나 그 사람의 봉 이 되어주는 건 나에게도 큰 즐거움이다.


넌 나의 봉이야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이름도 예사롭지 않아 그냥 이름만으로 저장하기엔 의미가 남다르다 보니

너무 이쁜 우리 채원이 라는 긴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냥 이쁜도 아니어서 너무라는 수사를 붙여 넣어야만, 정확하게는 아니어도, 채원이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알게 해 준다. 아마 이 정도가 내가 채원이와 조카들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채원이의 졸업식을 보며 난 순간순간 뭉클했고 순간순간 울컥했다. 검은색 가운을 입은 채원이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 옛날 유치원 졸업식 때가 생각이 났다. 그 얼굴 그대로 변하지 않은 얼굴에 덩치만 커진, 채원이의 밝은 표정도 그때와 똑같았다. 늙는다는 건, 이런 느낌인 걸까! 시간을 시간으로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불쑥 커버리는 게 아닐까!


채원이의 졸업식이 있어 양평으로 가는 길, 그곳은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들이 하얀 둔덕으로 쌓여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 주차를 한 후 친절한 수위아저씨의 안내를 받

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운동장 앞으로 몇 개의 건물들이 붙어 있었다.


졸업식장으로 들어가기 전 학교를 둘러보았다. 명문 사학 다운 포스가 느껴졌다. 학교를 둘러싼 자연 풍광이 멋스러웠다.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식전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드럼소리와 기타 반주가 흥을 돋구웠다. 아이들은 콘서트처럼 박수를 치고 춤을 추웠다. 아이들이 내뿜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엄숙하다면 엄숙했던 졸업식이 시작됐다. 졸업식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식순과 형식은 변하지 않았다. 소개해야 하는 내외빈들이 많았다. 교장선생님과 이사장의 축사도 이어지고 나서야 드디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펼쳐졌다. 미국 아이비리그나 대학 졸업식장에서 봤었던 장면이었는데, 아이들은 일제히 까만 학사모를 벗어 하늘 위로 던졌다. 새까만 학상모가 동시에 날아올랐다. 아마도 그 순간만을 한컷으로 사진 안에 넣는다면 졸업식 장면은 어떤 낭만과 즐거움이 함축된 이미지로 존재하게 된다. 마치 그 장면은 여름 장마가 끝난 어느 날, 파란 하늘 위를 가득 메운 고추잠자리들이 군무를 추며 비행하는 장면과 같았다.


아이들은 각 교실로 흩어져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채원이는 마치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하는 관광 가이드처럼, 큰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러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자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크게 웃어 저쪽을 보면서 그때 찍어 "


이런 말을 사진을 찍을 때마다 무한 반복 하면서,


역시나 채원이의 그 묘한 에너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친구들은 채원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졸업한 선배들도 여러 명 찾아왔다. 밥을 먹으면서 식당으로 인사온 선배들을, 처남댁은 인사차 배웅을 나갔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삼십 년 전의 졸업식을 생각했다. 아웃사이더에 몰려다니는 친구들과 우르르 개떼처럼 뭉쳐 있어야만 마음이 놓였던 시절이 생각이 났다.


이제 채원이는 다시 기숙학원으로 들어갔다. 그 고달픈 자기와의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채원이를 산골짜기 기숙학원에 남겨 놓고 돌아오는 길이 편치는 않았다.


이제 채원이의 인생에서 몇 번의 졸업식이 남았을까 아마 한두 번의 졸업식이 더 지나가면 채원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으리라.


우리에겐 첫 아이였던 채원이,

그래서 모든 게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늘 그렇듯 채원이가 선택하는 모든 것들이 채원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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