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시선이 뭐가 중요해
혼술이 빛나는 순간들
"하지만 철학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사람들 틈사이에 끼어사는 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모습이 곧 우리일 거라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끊임없이 신경 쓰면서, 가능한 한 호감을 주려고 애쓰면 협착꾼이나 사기꾼으로 간주되지."
<불멸 중에서 밀란쿤데라 >
모태솔로란 말이 있다.
아마도 이 말은 아무리 열심히 연예를 해도 여자친구가 생기지 않은 남자들이거나, 결혼할 나이가 한참 지났는데도 독립할 생각도 없이 부모님 집에서 먹고 자는 자식들 이거나,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혼자 혼술을 하거나 혼밥을 하는 사람들 전부를 총칭하여 붙여진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이성 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부르는 말, 그 말이 모태솔로다. 그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재능 아닌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슬픈 말이기도 하다.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세상에는 많이 있다.
사람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태어나서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들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해서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자기라는 사람이 주는 만족감과 때론 자괴감에 빠져 살아간다. 그건 외모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고, 또 아무 운동이나 쉽게 배우고 익히는 운동신경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아무래도 이런 느낌을 들게 하는 데는 공부만 한 것이 없다. 공부를 엉덩이힘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고도의 집중력으로 투자한 시간과 반비례한 성적을 만들어내는, 마치 로그 그래프처럼, 좋은 성적을 받는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단언컨대 공부 머리가 없다 보니 늘 공부한 시간에 비해 성적이 그리 좋지가 못했다. 그렇다고 바닥은 아니어서 늘 중상위권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곤 했다. 내 옆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은 늘 나에게 야 그렇게 공부했으면 다 맞아겠다 라며 놀리곤 했는데 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공부머리가 없는 나를 탓하곤 했다. 늘 그렇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아예 공부를 놔 버리던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런 일탈은 내가 부릴 수 있는 소심한 반항 정도에 그쳤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예 공부를 안 할 수도 없어서 대학을 가기 위해서라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하려고, 어쩌면 친구들은 너무 쉽게 공부해서 잘 나오는 성적을, 나는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평균을 얻기 위해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음악적 재능과 글쓰기 재능을 선물처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지만, 그걸 후천적으로 얻기 위해 나처럼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혼자 놀기의 달인들은 남의 시선을 그리 의식하지 않는다. 남의 눈에 보이는 자기 모습에 많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점이 남들에게 호감을 주며 어떤 점이 우스워 보이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단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혼술과 혼밥의 시대라지만, 난 혼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편도 아니어서,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이면 맥주 한두 캔을 까서 먹곤 한다. 하지만 혼자 먹는 술에는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술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한두 잔 하다 보면, 술자리에 있어야 되는 이야기가 없어진걸 금방 알아간다. 이야기도 안 하면서 먹어대는 술은 그리 맛이 없다. 김 빠진 사이다처럼, 단맛만 있을 뿐, 톡 쏘는 탄산맛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혼술과 혼밥을 즐기는 분들에게는
"무슨 그런 억지가 있습니까 그게 혼술의 맛이에요 좀 더 해보세요 푹 빠지실 거예요"
하며 나를 다그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하루하루 육아로 지쳐갔을 때, 하루가 끝나는 시간은 아이들이 잠이 드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꿀맛 같은지, 아마 육아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조용히 냉장고 문을 열고, 냉장고 깊은 곳에서 몇 주째 잠들어 있는 맥주 한 캔을 꺼낸다. 아무래도 혼술의 백미는 맥주캔을 딸 때 나는 찰칵 거 리는 금속 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나의 신체는 맥주캔을 따는 소리만으로 맥주 한 목음을 마신듯한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 이소리야 시원한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처럼, 맥주캔은 자기만의 데시벨로 캔뚜껑을 열어준다. 그리곤 이내 벌컥벌컥 갈증이 나는듯한 제스처를 취해가며, 맥주를 넘실대 나오는 맛있는 먹방소리를 찾아가며, 맥주를 목울대로 넘긴다. 냉장고의 세팅온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맥주 한 캔은 그새 온몸에 땀샘이 솟아나듯 땀을 흘린다. 주변 공기가 서늘해질 정도로 수분을 빨아들이는 맥주는 맛과 향으로 혼술의 재미를 더해준다.
여기에 더 첨가해야 할, 더 필요한 것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아마도 이런 혼술이라면, 혼술이어야만 되어야 되지 않을까, 하루의 긴 기다림의 끝, 하루의 고된 깊이를 말끔히 씻어줄 것 만 같은 그 시간은, 오직 혼술이어야만 가능하다.
아마도 이런 혼술은 영화 쇼생크탈출의 버드와이저를 마시는 옥상신이 생각나게 한다. 태양빛이 옥상으로 뜨겁게 떨어지는 감옥에서, 죄수들은 파란 줄무늬 옷을 입고, 한 손에는 빨간색 라벨의 버드와이져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 곁으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편지의 2 중창이, 적어도 맥주를 마시는 여러 장면 중에서 이 장면만큼, 오래도록 생각나고, 또 버드와이져를 생각나게 해주는 장면은 없었다.
혼술과 혼밥을 넘어서, 요즘은 영화도 혼자보고 등산이나 캠핑도 혼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야말로 일인시대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혼술과 혼밥은 어쩔 수 없이 살다 보면 혼자 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또 하다 보면 적응도 돼서 별 거부반응 없이 하게 되지만, 그 외 다른 것들, 특히 혼자 여행을 하거나 혼자 캠핑을 하거나 혼자 영화를 보고 문화생활을 하는 것들은, 나에게 많은 용기를 필요케 한다. 용기가 있다고 해도,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문화적 트렌드를 넘어서 이젠 홀로 살아가야 되는 생존과도 연관되어 있다 보니, 싫어도 해야 되는 것들이 생기게 된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혼술이 때론 어떤 술자리로도 대체되지 않는 만찬이 되어준다. 내게 더 필요한 게 있다면,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대답할 것이다.
"가끔은 혼자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미술관도 가고 여행도 다닐 거라고"
아마도 혼자 하는 모든 것들 속에는 온전히 모태솔로의 보이지 않은 유전자가 찬란히 빛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