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이란
직업으로써 숭고함
- AI도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을 찾아서,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 어찌 보면 그런 감정은 상대방에 대한 호감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일 수도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런 감정은 첫 만남에서부터 궁금한 사람이 있고, 오랜 시간 같은 모임에 있어도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안 보이고 그 사람의 직업만 보이게 된다. 이름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 어떤 일 하시는 분 이라든가, 아! 어느 직장 다니시는 분으로 기억된다. 직업과 사람을 동일 개념으로 기억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들이 있다.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서 생각해 보면 아 저분은 세무사였지, 아 저분은 추어탕집 사장님 이였지 그분의 직업이 연계돼서 생각이 났다.
그건 분리돼서 생각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은 그 사람의 이름은 생각이 안 나지만,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또렷이 기억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이름보다 직업이 더 기억에 남아 있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흔히 볼 수 없는 직업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자주 만나게 될 직업은 아니어서 그날 보았던 사람에 대한 글을 적어 보았다.
벚꽃이 만발하던 어느 봄날에 장인어른은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누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큰일을 경험한다. 그날 부모님 장례를 치르면서 젊은 장례지도사를 만났다.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이 주는 선입관이 있었던 걸까 첫 만남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장례지도사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건 마치 비행기를 운행하는 기장처럼 제복이 꽤나 잘 어울리는 젊은 사람처럼 보였다. 앳땐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하얀 천으로 돌돌 말아 올린 거대한 꽃상여가 동네 한바바퀴를 돌고 있었다. 그 상여 위에 올라탄 할아버지는 종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이런 상여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장례문화가 바뀌었다. 난 그때 초등학생이었고 남아있는 기억 속에 장례를 주관하는 할아버지의 구슬픈 목소리가 떠올랐다.
장인어른을 잘 모시겠다고 설명해 주는 장례지도사는 그렇게 나이가 들지 않은 젊은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거칠지 않았다. 어떤 수의를 입혀드려야 할지에 대해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한 가지씩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젊은 장례지도사가 장인어른을 염하고 수의를 입혀 드렸다. 입관식 때 장례지도사의 따뜻한 손길로 숨결이 떠나버린 고인의 채취를 느낄 수 없었다. 화장을 하고 수의를 입고 작은 관속에 누워있기까지 장례지도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 손길이 한없이 고마웠다. 죽은 이를 향한 살아 있는 사람의 마지막 손길은 자식도 손자도 아내도 아니었다. 장례지도사의 마지막 손길이 그렇게 따뜻하게 보여서일까 내겐 그만한 위로가 없었다.
장례지도사는 삼십 대 정도로 보였다. 많아봐야 사십 대는 안되어 보였다. 난 그때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보았다.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젊은 사람이 궁금했다. 그가 하는 일은 시신을 염하고 수의를 입히고 죽은 사람의 마지막길을 동행하는 일이다. 장례식장과 화장장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그분들의 일이다. 손길 닿는 모든 곳에 죽음이 있다. 업으로써 숭고함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장례학과도 생겼다고 한다. 생과사가 무한히 반복되는 인간사에 있어 망자에 대한 예의가 사라지지 않은 한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은 살아남을 것이다. 아마도 AI로 인해 없어지는 직업군 속에서 살아남는 몇 안 되는 직업일 것이다.
세상은 지나간 시간보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의해서 더 많이 변할 것이다. 아마도 아이들의 시대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직업은 거의 없어질 것이다.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으로 살아가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숭고함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행복할 거라 말해 준다.
난 가끔 그 젊은 장례지도사만큼 내 일을 사랑하는지, 그 이후로 자주 묻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