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브투(Have to) 스터니 잉글리시
영어 울렁증
-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영어
누구에게나 무서운 게 있다.
그건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대단한 것일 수도 있다. 그건 여름철 나무주걱에 핀 푸른곰팡이 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해야 되는 무대공포증 일 수도 있다. 때론 너무 깔끔을 떨어서 신발장과 옷장 정리가 안 돼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들도 있다. 깔끔 병을 가진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무서운 것들은 이런 것들 보다 더 다양해서 듣고 보면 우스운 것도 있고 정말 무서운 것들도 있다. 엄마는 부엌 새 간을 닦고 쓸고 유난을 떨어서 검은 가마솥이 반짝반짝 윤이 났다. 얼마 안 되는 주방 살림을 누구에게 보여주기라도 할 것처럼 시간을 들여 행주질을 했다. 엄마에게 무서운 것은 누군가 기름때로 더러워진 부엌에 손을 대는 것이다.
나에게도 무서운 게 몇 가지 있다. 어렸을 때는 전설의 고향을 본 날이면 긴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귀신 때문에 며칠을 잠을 설쳤다. 나이가 들면서는 해마다 하게 되는 건강검진이 무섭다. 지금도 건강검진이 다가오면 유독 성당을 더 자주 나가고 기도 시간이 길어진다.
나이 들수록 무서워지는 것들 중엔 영어 공부가 있다. 건강검진 다음으로 무서운 게 영어 공부다. 해도 안된다는 걸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들인 시간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말하기 창피할 정도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유독 나에겐 영어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다. 그것도 빙산, 보이지 않는 산이 더 크게 숨어있다.
왜 그런 게 있잖은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들이 하나둘씩은 있기 마련인데, 어떤 사람은 축구나 족구 같은 발로 하는 운동이거나, 소개팅을 많이 해도 생기지 않은 여자친구 이거나, 나와 같이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영어가 그런 분야에 속한다. 늘 그렇듯 안 되는 게 사람들마다 하나씩은 있다.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남들은 쉽게 쉽게 하는 영어를 말이다. 누군 간 영어 공부엔 왕도가 없는 법이라고 했고 또 누군 간 꾸준함만이 방법이라고 했다. 중학교, 그러니까 열네 살부터 영어 공부를 했으니 장작 사십 년 동안 영어 공부를 해도 그다지 나아진 게 없다. 그렇다고 읽고 쓰기마저 못하는 건 아니어서, 말하기에 비하자면 조금은 낫지만,
영어의 궁극의 목적은 저 멀리 금발의 외국인이 다가온다거나, 앵글로색슨족으로 보이는 외국인을 본다거나 그냥 유럽인이나 서양인의 외모를 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에 나타난다. 적어도 이때 우리는 눈꼬리를 내린다거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딴짓을 한다거나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실상은 늘 이와 반대로 행동한다. 우선 눈길을 피하고 딴짓을 하고 나에게 질문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 있게 하고 싶은 말을 해야 되는데 말이다. 여기까지는 모 그냥 타고난 성품으로 안면몰수하고 안 되는 영어로 질문을 몇 마디 던지는데 까지는 성공을 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너무나 빨리 스쳐 지나가는 원어민의 이야기는 귀에 닿지 않고 사방으로 튕겨나간다. 아무리 집중을 해서 듣는다 해도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때부터 등줄기에서 땀이 흐른다.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구친다.
난 다시 한번 슬로 워딩 스피치 플리즈를 한 자 한 자 이야기한다. 이미 나의 말도 안 되는 영어를 듣고 대화가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외국인은 그때부터 보디랭귀지까지 섞어 가며 친절히 배려를 해준다. 한마디로 어린애들 대하듯이 언어가 아닌, 단어로, 아주 천천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말을 건넨다. 다행이다 싶다가도 순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래도 꽤나 한답시고 공들인 영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온다.
울러 증은 그렇게 시작된다.
피해 가고 싶은 것들, 하기 싫은 것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막상 부딪치면 머리가 하얘져서 그나마 알고 있는 단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작년에 가족여행으로 하와이를 갔을 때였다. 난 자신 있게 입국 심사대 앞에 섰다. 입국 심사대 안에서 제복을 입고 있는 백인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로 우리 가족을 쳐다보았다. 마치 영어 스피치 레벨 시험을 보려고 선생님 앞에 서있는 학생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긴장감이 들었지만 그래 일상적인 공항 영어 물어보겠지 하며 예상 질문을 되새겼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입국 심사대 직원은 유리부스 안에서 생글생글 웃어가며, 외국인 특유의 어깨 진과 눈짓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캬 저 자연스러움,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여유와 몸에 밴 완벽한 영어 그 자체였다.
처음 몇 가지 질문들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며칠 묵을 것인지,
여행 목적은 무엇인지는 얼마나 연습을 했던지 들리지 않던 나의 귀에도 쏙쏙 정확한 워딩으로 들려왔다. 문제는 그다음 질문이었다.
현금을 얼마나 가지고 왔냐는 질문이었다. 하우머치머니알유브링 (How much money are you bringing)
만 달러 이상의 현금은 신고해야만 하기 때문에 늘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순간 난 돈의 단위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원 싸우 존드로 해야 되는지 원헌드레드로 해야 되는지 고민하다가 원헌드레드로 이야기했다. 뭔가 이야기하고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입국 심사대 직원은 농담하냐며 다시 질문을 했다. 순간 울렁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의 두 눈이 집 잃은 강아지처럼 흔들리는 걸 알았던지, 원 따우전 드 오케이 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들과 아내는 입국 심사대를 통과해 나오면서 웃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무사히 빠져나온 거야 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아이들 앞에서 밑천이 드러난 영어실력이 마냥 좋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영어 공부를 한다. 토익시험을 보기 위해서 일 수도 있고 입시를 위해서 일 수도 있고 또 취업을 위해서 일 수도 있다. 그냥 해야만 하는 거니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난 책을 읽을 때나 원어민을 만날 때 영어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생긴다. 특히 좋아하는 작가의 번역된 소설을 읽을 때 그런 욕구가 분출한다. 영어로 되어있는 폴 오스터의 소설을 막힘없이 읽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 감동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한 번이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모국어처럼 영어로 말할 수 있다면,
나에게 영어는 소통이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래 영어 공부를 시작하자라고 생각해 보지만, 시작하는 것도 어렵고, 꾸준히 공부하는 것도 어렵다.
이래서야 영어 울러 증을 탈출할 수 있을까 가끔은 해열제나 진통제를 먹고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지듯이, 주사나 알약 하나만 먹고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이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만화 같은 상상을 해본다.
이미 살아오면서 수십 번 실패한 게 영어 공부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게 영어 공부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해부 투 (Have to) 스터디 잉글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