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풀의 비밀 - 생장점

인류가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

by 둥이

풀의 비밀


아버지는 젖소를 키워 우리를 가르쳤다. 해본 사람은 안다. 젖소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이란 걸, 젖소는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젖을 짜야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늦은 저녁까지 때에 맞춰 밥을 주고 젖을 짜줘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중노동이다. 아무리 농장이 현대화되었다 해도 젖소를 키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일은 소똥 치우는 일과 소밥으로 줄 풀 베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 국민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다녀오면 형과 함께 풀을 베러 다녔다. 지금은 도시로 변해버린 기흥에서 개천과 논두렁에 베도 베도 올라오는 풀을 베러 다녔다. 그래서인지 풀만 봐도 당장 일거리로 보였다.


그때는 풀들은 원래 그런가 보다 했다. 단 한 번도 풀과 잡초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김수영시인의 풀이란 시를 읽고 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 적은 있다.


" 아 그렇지 풀은 바람 부는 데로 눕지"


어쩌면 그 말은 언어유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냥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심오한 뜻이라도 있는 양 하는 것처럼 들렸다.


난 날씨가 더워지는 여름이 다가오면, 온 동네 논두렁과 시냇가 주변으로 뭉개 뭉개 솟아오르는 초록색 풀들이, 단순하게 낮으로 베어야만 하는 젖소의 먹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는 시어를 번뜩이게 하는 사물로 보이겠지만, 적어도 그 당시 나에게는 반나절 베어야만 젖소를 먹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낮질은 몇 번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풀의 밑동을 보고 낮을 옆으로 뉘우 밑동방향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들으면 베어진 풀들이 낮끝단 안쪽으로 가지런히 모이게 된다. 그건 가을이 되면 하게 되는 벼베기와 비슷해서, 풀이 베어질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절단된 풀의 밑동에서 풀의 진액이 퍼져 나와 풀냄새가 진동하게 된다. 그렇게 처음에는 싫어서 억지로 하게 되는 풀베기는 하다 보면 사각거리는 소리와 풀냄새에 묘하게 빠져들어 내가 풀을 베는지도 모르게 된다. 관성의 법칙이랄까? 모든 시간이 멈춰서 풀베기의 몰입해 있는다.


나에겐 풀은 베어야만 했던 소의 먹이에 불과했다. 이랬던 풀이

"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을 읽고 풀이 있어서 우리가 살 수가 있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식물은 생장점이 있다. 나무의 생장점은 나무 끝에 있다. 햇빛을 받기 위해 나뭇잎들은 햇빛이 쏟아지는 하늘로 올라간다. 그 책을 읽기 전에 풀도 나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전혀 맞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풀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강점이 있고, 이것이 오늘날의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풀은 끝부분에서부터 자라지 않는다. 밑에서부터 자란다. 자라나는 부분(세포분열과 성장이 일어나는 부분)은 엄밀히 말하면 분열조직이라는 곳인데, 풀은 그 부분이 밑동 근처에 있다. 그리 흥미로운 사실로 들리리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풀의 끝부분을 잘라낸다 해도 풀은 계속 자라난다."


<p49.6장 풀 - 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에서>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한여름 모든 식물은 땅이 뿜어내는 기운을 받아 무섭게 자라난다. 한 뙈기 텃밭에 심어놓은 작물들과 논두렁의 벼들도 이 여름에 쑥쑥 자라난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솟아나는 잡초와 베도 베도 올라오는 풀들이 가진 미스터리한 비밀을 그제야 알게 됐다.


어렸을 적, 시냇가에서 밑동까지 깡그리 베어낸 풀들이, 며칠만 지나면 언제 베어낸지도 모르게 무성하게 올라왔던 이유가, 생장점에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난 베어낸 풀들 옆에서, 어린 새싹이 올라오듯 여린 풀들이 올라오는 줄 알았다. 베어낸 풀들은, 베어낸 자리에서부터 다시 풀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제야 조금 그 많은 소 먹이로 풀들을 베어내도, 풀들의 위세가 꺾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게 단순히 웃을 일은 아닌 듯했다. 아마도 이런 이치에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스며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게 만든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카르레나에는 그 방대한 줄거리보다 더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레빈이 시골 영지로 내려가 일꾼들과 함께 풀 베는 장면이 나온다. 레빈은 그가 가진 번민과 고민이 어느새 풀베기라는 단순 노동을 통해, 사라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풀베기에 몰입되어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시점에서 그는 사라지고 오직 풀베기라는 반복된 동작만 남게 된다.


풀베기라는 단순 노동은 묘한 중독성을 지닌다. 처음에는 힘들다가도 어느새 어느 시점이 지나면서 풀을 베고 있다는 생각을 잊게 만든다. 그리고 소리와 냄새만 남는다. 그리고 베인 풀밭 위로 잔디밭처럼 가지런한 풀밑동들의 푸른 들판을 만들어 놓는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야 알았다.

풀의 비밀을,

풀은 비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고기를 좋아하는 인류를 번영시킬 수 있었다.


풀의 생장점, 그곳에 인간이 번성하여 창조물의 주인이 되라는 신의 뜻이 스며있었다.


풀의 생장점은 그것 하나만으로, 이미 방대한 논리와 지식을 넘어서, 인류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해 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