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방학이 반갑지 않은 이유
아내가 여행을 가는 이유
그날 저녁 아내는 회색가방을 꺼냈다.
하와이 다녀온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여러 개 가방 중에 사이즈가 제일 작은 가방이었다. 아내는 옷방으로 들어가 회색가방에 옷가지를 챙겨 넣었다. 속옷과 양말 비상약과 충전기 얇은 잠바와 짧은 반바지 하와이 다녀온 후 대여한 두 권의 영어회화책과 미사포 혼자서도 찍을 수 있는 셀카봉과 가벼운 회색 스니커즈, 회색가방 안은 아내의 짐들로 채워졌다. 다음날 아내는 달달한 소시지볶음과 고소한 감자조림 반찬을 만들어 정사각형 락앤락통에 담아 냉장고 두 번째 칸을 채워놓았다.
언제나 아내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닷듯히, 열두 살 아이들은 아내 심기를 건드리던 어느 날, 분노게이즈 모드가 통제가 안 되는 어느 날에 아내는 여행을 떠난다.
그런 여행은 아내가 집을 나서게 되는 여러 이유와 전혀 다른 것이다. 고등학교 단짝 친구와 약속이 있다거나 평소 사고 싶었던 스트라이트 무늬가 들어간 니트를 사러 쇼핑을 간다거나 단기 예금 예치일이 석 달이 지나서 은행에 볼일을 보러 갔다거나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었다면 좋겠지만,
그러니까 특별히 일이 있어서 나간 건 아니어서 더 마음이 아프다 할 수 있는 그런 경우다. 한마디로 번아웃 되기 직전에, 깜박이던 신호가 점멸되기 직전에 아내는 여행 가방을 싼다.
볼일이 있어 나갔다면 이렇게 궁상떠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12살 쌍둥이 아들 육아로 분노게이지가 고장 날 때쯤, 조용히 몇 가지 밑반찬을 해놓고 여행을 간다.
다행인 건 삼박사일 아내의 여행은 한 편의 엑소더스가 되어 준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홍해가 갈라지듯이, 아내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돌아온다.
그날 저녁 아내의 셀카사진을 보며 내 마음을 가장 흔들어 놓은 것은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자유로운 모습, 아내는 온전히 바로 이 순간에, 끊임없이 존재하며 언제 까지고 계속 전개되는 현재에 살도록 해주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내가 아는 이십 대의 자유분방함으로 셀카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편안하고 안정된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셀카봉을 들고 커다란 사과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다른 사람에 반응에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무관심은, 한때 아내임을 말해주었던 징표들이었다.
아내는 늘 그래왔듯이 며칠 안가 웃음기가 사라 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셀카봉을 들고 여행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