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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노트- <행복을 여는 열쇠>

내가 좋아하는 시간들에 대하여

by 둥이

스프링노트 - 행복을 여는 열쇠


나는 스프링노트를 좋아한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스프링노트를 좋아하는구나 나는걸 알게 된 건, 어디서 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스프링노트들이 책꽃이과 서랍 안에 쌓여 있는 걸 보고 알게 되었다. 열여덟 살 내 조카는 옷을 좋아해서 옷장과 행거 안에 상표도 뜯지 않은 옷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기억이 났다. 연예인 중 한 명은 신발 특히 운동화를 좋아해서 벽면 전체를 운동화를 보관하는 수납장으로 만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해서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 출장길에 사 오는 노트들이 꽤 많이 쌓여있다. 굵은 스프링에 묶여 있는 스프링노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의 구매 욕구에 불을 지른다. 크기도 다양하고 색상과 디자인도 제각각 이여서, 노트면 다 비슷하지 무슨 차이가 있겠어하는 분들을 만나면, 붙잡고 해 줄 말이 많아진다. 평범하고 비슷해 보이지만 우선 종이 질감부터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윤기가 나는지, 광택이 없고 까칠한지, 종이두께는 어떠한지, 촉감은 어떠한지 이것저것 주의 깊게 살펴본 후 아 이거야 하고 선택해야 후회가 없다. 보이는 데로 사다 보면 쌓여만 가고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 하나둘씩 버리게 된다.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메모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스피링노트는 좋아한다. 출장을 많이 다닐 때는 크기가 대학노트 만한 큰 사이즈로, 색상별로, 종이질감별로, 하드커버디자인별로 눈에 띄는 데로 구매했다. 이상하게도 공항 안에는 이런 서점들이 가는 길목마다 딱 길을 막고 서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눈에 가는 스프링노트들을 사고 나면 마냥 흐뭇할 수가 없다. 빈노트를 펼치고 손바닥으로 문질러 본다. 냄새도 맡아보고 종이 질감과 촉감은 어떤지 제대로 산건지를 점검한다. 나에게 이 시간은 소소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시간이다. 마치 도공이 오랜 시간 도자기를 구워낸후 가마에서 꺼낼 때의 기분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너무 나간 기분은 들지만 어찌 되었든 그 정도의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스프링노트들도 나라마다 종이질감과 디자인이 다르다. 종이가 가벼운 것도 있고 무거운 것도 있고 거친 것도 있고 광택이 나는 것도 있다. 흑연가루를 잘 받는 종이가 있고 흑연가루를 튕겨내는 종이도 있다. 카본잉크가 잘 먹어 들어가는 종이도 있고 카본잉크가 번져가는 종이도 있다. 한마디로 글씨가 잘 써지는 종이가 있고 같은 노력을 들여도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은 종이들도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스프링노트가 예쁘고 이유 없이 끌려서 나도 모르게 구매를 했다 치면, 어느 순간 나의 스프링노트 구매 목록을 보면 A6 사이즈 정확히는 105*148mm 캠퍼스스프링 노트만 구매를 한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사이즈여서 가방에 넣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닿은 것과 촉감과 그날의 바람소리와 햇볕의 강도를 끄적인다. 그런 것들 보다 더 많이 적게 되는 게 있는데 지금은 스프링노트의 존재 이유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닿은 문장들을 필사하는 데 있다. 큼지막한 글씨체로 한 장에 몇 줄 정도로 적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노트 한 권이 꽉 채워진다. 그렇게 필사노트로 때로는 작가노트로 사용한 지가 십 년 정도 돼 간다. 책꽂이 한 칸은 이렇게 적어나간 스프링노트가 행사장에 꽂혀있는 노트처럼 가지런히 줄맞쳐 꽂혀있다. 나는 성당을 가거나 지인분을 만나러 가거나 회사를 갈 때도 가방 안에 꼭 들어가야 되는 게 있는데 소설책 두세 권과 지금 적고 있는 필사노트와 예전 언제인지 모를 필사노트를 꺼내 가방 안에 넣고 나간다.


하루를 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틈새시간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 비로소 난 예전 적어둔 필사노트를 꺼내본다거나, 읽다만 폴오스터의 소설과 파트릭모디아노의 소설을 이어서 읽는다. 아마도 그 시간은 내가 누리는 가장 호사스러운 시간일 것이다.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시간은, 그 시간 동안 먼지처럼 적재된 감정의 찌꺼기를 필터링해준다. 흡입력 강한 청소기로 빨아들인 것처럼, 마음속 한편이 깨끗해진다. 아마 스프링노트가 가방 안에 있다는 것 만으로,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과 행복 에너지를 충전받을 수가 있다.


그렇게 스프링노트의 사용용도가 하나의 엑소도스가 되어준 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아하는 작가의 어느 문장을 필사하고 틈새로 다가오는 시간을 적어가는 동작은, 힘 안 들이고 단단한 현실을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시간으로 바꾸어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하루라는 시간 곳곳에 배치하고 정렬해 나가는 것 하나만으로 우린 충분히 건강해진다. 나에게 이런 시간은 따뜻한 햇볕만큼 소중한 것이어서, 난 의도적으로 틈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회의를 참석하기보다는, 자투리시간을 더 늘려 나에게 선물하곤 한다. 그럴 때면 강렬한 여름햇볕을 받아 진해지는 식물들의 엽록소처럼, 내가 가진 모든 세포 들은 세포분열을 한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그리고 무한히 증폭되어 퍼져나간다. 마치 호수 위로 퍼져가는 물의 파동처럼,


하얀색 하드커버 스프링노트에는 소소한 일상이 스며들고, 폴오스터와 파트릭모디아노와 박경리작가의 문장이 더해진다. 지루할 것 없는 이런 시간들은 하루를 살아가며 촘촘하게 틈새와 틈새 어느 공간에 정렬된다. 충분히 의도적으로 배치된 시간들이다. 나에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영양분을 만들어준다.

그것 하나만으로 감사할 일이다.

어쩌면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존재의 인정은 감사라는 마음이 바쳐 줄 때라야 피어나는 꽃과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어 따뜻한 햇볕을 등지고 폴오스터의 소설을 이어 읽으며 그의 문장을 스프링노트에 적는다는 것은 그냥 감사할 일이다.


행복은 복잡할 것 같지만, 너무 단순한 것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시간들을 자기에게 만들어 주면 된다.


내가 가긴 시간의 정렬과 배치, 그 속에 행복 열쇠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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